관세에 이어 환율 전쟁이 점화될 조짐을 보이면서 외환시장 개입내역 공개를 둘러싼 미국 측의 요구가 거세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이 무역적자 해소를 명분으로 아시아 주요국에 통화가치 절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1985년 플라자 합의의 ‘데자뷔’ 우려까지 제기되는 상황이다.
16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기재부는 지난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외환 관련 협의를 진행한 이후 비대면으로 실무 협의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밀라노 협의 소식이 들린 후 시장에서는 원화 가치가 급등하고 원·달러 환율이 하루 만에 20원 넘게 하락하는 등 민감하게 반응했다. 앞서 이달 초 대만달러도 2거래일 동안 9% 넘게 절상돼 30여년 만에 최고 오름폭을 보였다. 대만이 미국과의 비공식 협상에서 통화 절상 요구를 받았다는 확인되지 않는 루머가 확산됐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통화 협상 소식이나 루머가 나올때마다 환율 변동성이 심화되는 것은 과거 ‘플라자 합의’ 트라우마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1985년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미국과 주요 4개국(G5)의 환율조정 합의는 당시 엔화의 급격한 절상을 초래했고, 이는 일본 버블경제의 출발점이 됐다. 엔화 가치는 합의 직후 한 달 만에 8.3% 급등했고 달러당 240엔대였던 엔화는 1년 만에 150엔대까지 떨어졌다. 그 이후 일본은 30년간 자산가격 붕괴와 장기 디플레이션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이에 대해 정부는 제2플라자 합의는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제2플라자 합의는 지나친 우려이며 우리의 환율 주권을 지켜가며 협의에 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플라자식 인위적 환율 조정은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은 것이다.
다만 미국이 외환시장 투명성을 명분으로 한국의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기존 ‘분기별’에서 ‘월별’로 공개하도록 압박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실제 한국은 미국 정부의 압박에 2018년부터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공개해오고 있다. 이전까지는 전면 비공개였지만 2018년 한미 간 외환시장 투명성 강화를 위한 협의가 이뤄진 이후 그 해 하반기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반기별 공개를 유지하다가 이후 현재까지 분기별로 개입 내역을 공개 중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실시간으로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공개하는 점을 고려할 때 미국 측에서 원화 절상 압박의 일환으로 월별 공개로 전환하라고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외환시장 개입 내역의 월별 공개가 실현될 경우 당국의 환율 관리 여력이 위축되면서 원화 강세 압력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외환시장 개입 내역의 공개는 그 자체로 환율 수준을 조정하는 수단은 아니지만, 타이밍과 방식에 따라 시장에 상당한 심리적 영향을 줄 수 있다. 기재부는 “관련 의제는 구체적으로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시장 안팎에선 미국이 국민연금 등 공공기금의 외화 매입 수요 축소까지 언급할 수 있다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실제 국민연금은 1000조원 규모의 자산 중 절반 가까이를 해외에 투자하고 있으며, 매년 400억~600억 달러 규모의 외화를 사들이는 ‘큰손’이다. 이는 외환시장에서는 원화 약세 압력으로 작용해왔다. 이 때문에 미국이 이를 환율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요인으로 해석하고 ‘자율 조정’이라는 명분 아래 통제하려 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다른 시나리오는 환헤지 비율 확대 요구다. 한국의 공공기금은 환위험을 줄이기 위해 일부 해외투자에 대해 환헤지를 실시하지만 현재 전체 자산에서 차지하는 헤지 비율은 높지 않다. 미국이 환율 안정성과 수익률 제고를 명분으로 환헤지를 확대하라고 권유할 경우 이는 결국 외환시장에서 원화 매수 압력을 높이는(원화 가치 절상) 방식이 된다.
다만 직접적인 외환정책 전환이나 통화정책 간섭은 ‘환율 주권’을 침해할 소지가 크기 때문에 공공기금 환헤지나 외환 수요 조절 등을 거론할 경우 환율 주권 논란은 피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미국 재무부도 지금까지는 한국의 외환시장 개입 내역 공개 여부에만 초점을 맞춰왔다. 지난 2018년 분기별 공개 전환도 미 재무부가 ‘관찰대상국’ 명분을 걸고 압박했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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