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미 달러화가 뚜렷한 약세를 보이고 있음에도 다른 통화와 달리 원화만 유독 힘을 못 쓰고 있다. 정치 불확실성과 내수 부진에 국내 경기의 하방 압력이 증가하는 가운데 미국발(發) 관세 위협에 매우 취약한 경제구조라는 점까지 부각되면서 원화만 맥을 못 추고 있다는 평가다. 엔화·유로화와 달리 뚜렷한 강세 재료가 없다는 것도 당분간 원·달러 환율의 하락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10일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1월 20일 이후 미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는 1% 넘게 절하됐다. 유로화(4.04%), 엔화(5.41%) 등 주요국 통화가 달러화 대비 절상한 것과 대조적이다.
달러화 약세에도 원화가 반등하지 못하는 주된 원인은 관세 불확실성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구조상 미국의 관세 위협에 더 취약한데 이 때문에 한국 자산을 바라보는 외국인들의 시선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윤재호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은 유별나게 수출 위주이기 때문에 미국의 관세 위험에 크게 노출돼 있다”면서 “다른 나라의 경우 내수로 상쇄할 수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관세 정조준에 나선 국가들의 통화들을 보면 캐나다 달러(-0.37%)를 제외하고는 중국 위안화(0.61%), 멕시코 페소(1.13%) 등은 되레 올랐다. 외인들이 한국을 미 무역정책의 최대 희생양으로 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경기 하강 우려에 한국 증권시장에서 외국인이 대거 이탈하는 것도 원화 가치 하락세를 키우는 요소다. 최근 한은은 내수 부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미국발 관세전쟁이 최악으로 치달을 경우 올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기본 전망(1.5%)에서 0.1%포인트 하락한 1.4%까지 낮아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처럼 한국 펀더멘털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외국인이 2월 한 달간 유가증권시장에서 팔아치운 금액만 3조 7026억 원에 달한다. 여기에 일명 ‘서학개미’라 불리는 국내 투자자들의 미국 주식 매수가 꾸준히 늘고 있는 점도 원화 약세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처음으로 내국인의 해외 증권 투자(9943억 달러)가 외국인의 국내 증권 투자(8378억 달러)를 역전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원화 가치를 끌어올릴 만한 별다른 정책 카드가 없다는 점도 요인이다. 유럽연합(EU) 최대 경제 대국이자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과 사회민주당(SPD) 간 연립정부 구성을 협상 중인 독일은 최근 인프라 투자에 5000억 유로를 투입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역대급 부양책 소식은 성장률 회복 기대감으로 연결돼 곧장 유로화 가치 상승으로 이어졌다. 엔화도 일본은행(BOJ)의 금리 인상 기대감에 큰 폭으로 뛰고 있다. 시장은 BOJ가 최근 물가 상승률을 고려해 이달 18~19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올릴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 경기 둔화 우려에 달러 약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이지만 원·달러 환율은 당분간 큰 폭으로 떨어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고관세 국가로 지목한 데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선고와 관련한 정치적 불확실성이 남아 있는 영향이다. 백석현 신한은행 연구원은 “중국만 봐도 딥시크 쇼크를 계기로 중화권 증시는 미국보다 상황이 훨씬 좋다”면서 “그러나 한국은 통화가치를 뒷받침할 호재가 없기 때문에 달러가 하락해도 원·달러 환율이 그 흐름을 쫓아가는 힘이 약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