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폭탄 등 ‘트럼프 스톰’이 몰아닥치며 우리 경제에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다. 구조적 저성장 위기에 빠져 빨간불이 켜진 상태에서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김세직(65)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10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경제성장률을 10년가량 평균을 내서 보는 장기성장률이 올해 0.9%로 떨어지고 2030년대에는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은 1960~1980년대 연 8% 이상이었던 장기성장률이 1990년대부터 5년에 1%포인트씩 하락해 ‘5년 1% 하락 법칙’의 덫에 빠졌다는 게 김 교수의 분석이다.
‘제로 성장’의 위기 상황에서 장기성장률 저하는 일자리 부족, 저출생, 양극화 심화, 연금 고갈 등을 초래하는 만악의 근원이다. 김 교수는 “정치권과 정부의 누구도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해온 근본 법칙인 ‘5년 1% 하락’을 언급하지 않아 안타깝다”며 “그러면서 경제와 민생 해법이나 구조 개혁 등을 운운하는 게 공허하게 들린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공지능(AI) 시대에 국민들과 근로자들의 창의력을 일깨우면 장기성장률을 높일 수 있다”며 “창의적 아이디어로 성장 엔진을 재점화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강조했다.
-고율 관세 등 ‘트럼프 스톰’이 강하게 몰아닥치고 있는데 경제학자로서 어떻게 보는가.
△애덤 스미스가 출간한 국부론이나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에 따르면 시장에서 교환과 무역이 자유롭게 이뤄질 때 모두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다.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이 이뤄져야 한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설립되고 각국별로 자유무역협정(FTA)이 활발히 체결된 게 이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일으킨 관세 전쟁으로 인해 세계 경제가 큰 위험에 처했다. 다만 1~2년 뒤 부작용이 크게 누적되면 트럼프도 관세 전쟁을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미국의 고율 관세 부과에 각국이 보복관세로 대응하며 부메랑이 커지고 있는데.
△관세 전쟁은 무역량을 감소시켜 생산·소비를 위축시키고 물가를 올리게 된다. 당연히 국민들의 행복도가 떨어진다. 트럼프는 관세를 때려 외국 기업을 유치하고 싶겠지만 성공하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 대만 TSMC로부터 1000억 달러 등 총 1조 7000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기로 했다고 트럼프가 최근 의회 연설에서 밝혔지만 제대로 될지 봐야 한다.
-1990년대부터 우리나라의 장기성장률이 5년마다 1%포인트씩 하락해왔다고 경고해왔다.
△연간 경제성장률은 정부의 재정 투입 등에 따라 왔다 갔다 할 수 있고, 잠재성장률은 기술 진보율과 자본 증가율을 산정할 때 자의적 가정이 들어가기 때문에 과다 추정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10년에 걸친 연간 성장률을 평균해 장기성장률을 계산하면 누가 계산해도 똑같은 값이 나온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단기 요소가 서로 상쇄돼 진짜 성장률을 구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장기성장률은 1990년대부터 5년마다 1%포인트씩 미끄럼틀을 탔다. 이른바 ‘5년 1% 하락 법칙’이다. 최근 우리 장기성장률을 추정하니 올해 0.9%에 그쳐 0%대로 추락하는 것으로 나왔다. 2029년에는 0.1%까지 떨어지고 2030년대에는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
-성장 엔진이 멈춰 심각한 상황이다.
△철강·해운·석유화학·조선·자동차·반도체 등 우리의 주요 산업들이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19년 TSMC를 따라잡겠다고 했지만 2020년까지 앞서가던 시가총액이 지금은 외려 4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2010년대 중후반 우리 장기성장률은 부동산 경기 부양으로 인해 추세보다 높게 나타났다. 2014~2021년 서울 아파트 가격이 2.5배나 올랐다. 가짜 성장이었다. 당시 삼성전자도 반도체 호황 덕분에 수출 증가에 크게 기여했지만 획기적 기술 혁신에 따른 게 아니었다. 인위적 부양책은 단기적으로 성장률을 올리지만 장기성장률 제고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려 거품을 키워 외환위기 같은 경제 위기를 부를 수 있다. 거품 붕괴 후 장기 불황에 시달려온 일본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정치권과 정부에서 ‘5년 1% 하락 법칙’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하다.
△여야정이 ‘5년 1% 하락 법칙’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연금·의료·교육·노동 개혁이라는 4대 구조 개혁을 강조하는 것은 허황됐다. 지속적인 장기성장률 저하를 외면하면서 경제와 민생 해법에 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공허한 립서비스처럼 들린다. 모든 경제 문제의 근본 원인은 장기성장률 저하이고 나머지는 이 법칙 주변의 곁다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자리·저출생·양극화·연금 문제 등도 모두 장기성장률을 올려야 해결된다.
-현 정부와 전임 문재인 정부의 성장 정책을 비교한다면.
△둘 다 경기 부양책만 썼다고 볼 수 있다. 장기성장률을 올리는 성장 정책이 아니라 연간 성장률을 단기적으로 증가시키는 총수요부양책을 썼다. 현 정부에서는 연구개발(R&D) 예산 감축과 의료 개혁 파행 등으로 장기성장률 저하를 초래했다. 스티브 잡스 같은 인재를 키워야 하는 데 과학적 근거 없이 섣불리 의대 증원을 추진해 이공계 황폐화를 불러왔다. 전(前) 정부 역시 장기 성장책보다는 단기 성장에 연연해 금리를 매우 낮게 유지함으로써 부동산 폭등을 방치했다.
-장기성장률 저하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더 이상 남이 만든 지식으로 열심히 짝퉁을 만들어 파는 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계속 개발해 ‘오리지널’을 만들어 수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삼성의 경쟁력이 하락한 것도 그 때문이다. 구성원이 혁신·창의적 아이디어를 내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국민과 기업들의 창의력이 부족하다. 학교에서 키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의 AI 벤처인 딥시크는 직원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할 능력을 키워주고 충분히 보상함으로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창의적 인적 자본을 빠르게 축적하는 방법밖에 없다.
-딥시크 창업자인 량원펑도 모방이 아닌 창의적 혁신을 강조하더라.
△우리는 100만 달러짜리 아이디어를 내도 훔쳐간다. 대기업이 벤처·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아이디어를 빼간다. 관은 민간, 전문가는 비전문가, 회사 윗사람은 아랫사람으로부터 각각 아이디어를 절도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는데 상당히 나쁜 말이다. 모방을 용인해 잘못된 문화가 형성됐다. 한국 학생들이 미국 대학원에 유학하면 지식 교육 과정은 잘하는데 연구 아이디어를 내고 논문을 쓸 때는 잘하지 못한다. 미국 학생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아이디어 훈련을 하니 우리가 당해낼 수 없다. 조지프 슘페터는 혁신하지 않는 최고경영자(CEO)는 그저 매니저일 뿐이고 종업원도 혁신하면 기업가라고 했다. 경제 성장은 기업과 국민들이 얼마나 창의적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AI 시대에 장기성장률의 마이너스 추락을 막으려면 창의력밖에 없다는 말씀인데.
△남의 아이디어만 전달하는 가짜 전문가가 많은데,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들에게 명예와 인센티브를 확실히 보장해줘야 한다. 그러나 아이디어와 창의력을 키워줄 수 있는 교육 제도가 전무하다. 그동안 창의적 인적자본 배출에 신경 쓰지 않은 우리 대학들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요구된다. 저는 ‘은행과 봉이 김선달의 공통점은?’처럼 정답이 없는 열린 문제를 과제나 시험으로 던지는 창조형 수업을 약 20년 동안 해왔다.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메아리가 없다. 정부와 정치권이 국민의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 정책 추진에 총력을 다해야 한다. 앞으로 AI의 발전으로 일자리를 잃는 경우가 크게 늘어날텐데 국민들에게 아이디어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 최근 ‘어웨이킹’이라는 책을 출간해 ‘내 안에 잠든 창의성을 깨우는 7가지 습관’을 소개했다. 국민들이 창의력을 키우는 훈련을 통해 혁신 아이디어를 많이 냄으로써 제로 성장의 위기로 치닫고 있는 우리 경제의 성장 엔진을 재점화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직장에서도 근로자들이 매주 3시간가량씩 10~15주의 창의력 과정을 밟도록 했으면 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처럼 모방형 인재가 창의적 인재를 밀어내게 놔두면 결코 장기성장률을 높일 수 없다.
-성장률 제고를 위해 앞으로 정치권이 역점을 둬야 할 것은.
△‘5년 1% 하락 법칙’을 직시하고 제로 성장 위기 저지를 국정의 제1과제로 삼아야 한다. 국민의 아이디어를 보호하고 혁신 교육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국민 아이디어 등록제’를 통해 아이디어나 특허를 낸 창조형 국민에게 세금 인하와 보조금 지급을 꾀하고 아이디어를 구매해줘야 한다. 교육과 R&D 예산의 일부만 투입해도 매년 수만 명에게 경제적 보상을 할 수 있다. 곁가지 정책들을 백화점식으로 나열하지 말고 장기성장률 높이기에 집중해야 한다. 구조 개혁도 장기성장률을 높이면 해결된다. 여야정이 장기 성장률 제고를 위해 총력전을 펴야 한다.
◆He is…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루커스 교수와 낸시 스토키 교수가 그의 지도교수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선임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뒤 2006년부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거시경제학과 경제성장론 등을 가르치다가 최근 정년 퇴임했다. ‘모방과 창조’ ‘어웨이킹’ 등의 책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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