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를 뒤이어 월가까지 인공지능(AI) 거품론에 대한 우려를 뒤로하고 천문학적인 자금을 AI 인프라 구축에 쏟아붓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이 자체 현금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막대한 투자비를 충당하기 위해 월가의 ‘큰손’들과 손잡고 빚을 내서라도 데이터센터를 짓는 형국이다. 뒤처지면 죽는다는 공포감(FOMO)이 작용하면서다. 이러한 ‘쩐의 전쟁’은 AI 거품 붕괴라는 잠재적 위험을 안고 있지만 당장은 메모리 반도체 공급 부족을 심화시켜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 실적에 강력한 상승 동력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23일 모건스탠리 리서치와 외신에 따르면 올해부터 2028년까지 전 세계 데이터센터 지출 규모는 총 2조 9000억 달러(약 430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아마존 등 기술 기업들이 자체 자금으로 충당하는 금액은 1조 4000억 달러(약 2100조 원) 수준로 절반에 살짝 못 미친다. 나머지인 1조 5000억 달러(약 2200조 원)는 외부에서 조달해야 하는 ‘갭(Gap)’이 발생하는 셈이다. 이 빈틈을 메우기 위해 사모대출(Private Credit)이 8000억 달러, 사모펀드(Private Equity) 및 기타 자금이 3500억 달러, 회사채가 2000억 달러가량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는 빅테크가 주도했던 AI 인프라 구축에 월가 금융 자본이 끼어들 틈이 생긴 셈이다. 월가는 과거 중형 기업 대출에 주력하던 관행을 깨고 빅테크의 인프라 파트너로 변신할 기회를 잡게 됐다. 자산운용사 블루아울(Blue Owl)이 최근 루이지애나 메타(Meta) AI 데이터센터 건설을 위해 300억 달러를 조달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중 30억 달러는 고객 출자금이고 나머지는 금융권 대출이다. 메타와의 파트너십이 깨질 경우 부채처럼 보증을 받는 안전장치까지 마련했다.
빅테크 현금 흐름만으로는 감당 불가한 투자 규모
빚으로 쌓아 올린 AI 제국, 셰일가스 붐과 닮은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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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는 이 같은 투자가 10여 년 전 셰일가스 붐 당시와 유사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전 세계 석유·가스 회사가 차입한 금액이 약 1조 달러였는데 이번 AI 인프라 차입 규모는 이를 훌쩍 뛰어넘는 1조 2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골드만삭스 등 일각에서는 투자 과열을 경고하지만 당장 수익을 좇는 자금의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오라클과 오픈AI, 엔비디아로 이어지는 순환 출자 구조와 부채 리스크도 도마 위에 올랐다. 오라클은 부채가 늘어나며 신용등급 강등 위기에 몰렸지만 엔비디아 칩 구매를 멈추지 않고 있다.
3조$ 중 10% 메모리 업체 몫…HBM·eSSD 수요 커
SK하이닉스 “공급 부족 지속” 자신감, 삼성은 맹추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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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월가의 공격적인 자금 살포는 한국 반도체 기업에는 중단기적으로 큰 호재가 될 전망이다. 통상 AI 데이터센터 구축 비용의 약 10%가 메모리 업체 몫으로 돌아간다. AI 데이터센터는 일반 데이터센터 대비 고대역폭메모리(HBM) 탑재량이 월등히 많고 전력 효율을 위한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 수요도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3조 달러에 육박하는 투자금 중 적게 잡아도 약 3000억 달러(약 430조 원)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의 곳간에 쌓이는 것이다. 데이터센터 구축 비용의 30~40%가 IT 장비와 반도체 구매에 쓰이고, 이 중 약 30%가 메모리 업체에 돌아간다는 점을 감안한 수치로 일정 부분 오차가 있을 수도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수주 잔고에서도 이 같은 신호는 잡히고 있다. 양사는 내년 수주 잔고가 이미 한계치에 도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올 3분기 실적발표(컨퍼런스콜)에서 SK하이닉스는 “HBM 수요가 계속해서 공급을 초과하고 있다”며 “내년도 HBM 물량은 이미 완판됐다”고 못 박았다. 고객사들이 돈을 싸 들고 와도 줄을 서야 한다는 자신감을 드러낸 대목이다.
삼성전자도 사실상 완판 소식을 전하며 수요 급증에 따른 증산 소식을 전했다. 3분기 실적발표에서 삼성전자는 “HBM3E(5세대)는 전 고객 대상으로 양산 판매 중이고 HBM4도 샘플을 요청한 모든 고객사에 출하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5세대 제품인 HBM3E를 엔비디아에 납품하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납품 사실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어 “내년 HBM 생산 계획은 올해 대비 크게 확대해서 수립했다”면서 “다만 추가적 고객 수요가 지속되고 있어 HBM 증산 가능성에 대해 내부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증산 결정은 이 발언 후 한 달도 되지않아 결정났다. 이달 17일 삼성전자는 향후 5년간 국내에 총 450조원을 투자한다는 소식을 밝히며 반도체(DS) 부문은 평택사업장의 5공장(P5)의 공사 재개를 공식화한 것이다.
빅테크 경쟁 도태 위기, 과소 투자가 더 큰 위험
월가까지 가세한 증설 경쟁 K-반도체 낙수효과
월가까지 가세한 증설 경쟁 K-반도체 낙수효과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빅테크들이 과잉 투자보다 과소 투자를 더 큰 위험으로 인식하고 있어 당분간 AI 데이터센터 증설 경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수요가 계속 증가하고 있어 공급이 따라가지 못한다”고 토로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월가가 쏘아 올린 유동성이 AI 인프라 투자를 가속화하고 그 낙수효과가 고스란히 K-반도체로 흘러들어오는 구조다.
장기적으로는 경계감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AI 서비스가 기대만큼의 수익 모델을 창출하지 못해 투자가 급격히 위축될 경우 그 충격파가 메모리 업계에 직격탄이 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월가의 부채로 쌓아 올린 수요가 붕괴하면 2000년 닷컴 버블 붕괴 때처럼 반도체 시장이 긴 겨울을 맞을 위험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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