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이어진 사법 리스크를 올해 완전히 벗은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회장이 내년 사장단 인사의 키워드를 ‘안정’과 ‘기술 중시’에 뒀다. 반도체·모바일 등 실적 확대를 이끈 주요 경영진을 신뢰하며 힘을 싣는 한편 기술 인재를 전면에 내세워 미래 사업을 선점하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했다.
삼성전자는 2026년 사장단 인사를 단행하며 전영현 반도체(DS) 부문장 겸 부회장과 노태문 모바일·가전·영상디스플레이(DX) 부문장 사장의 ‘2인 대표이사 체제’를 핵심으로 내세웠다. 양대 부문장은 각각 메모리사업부장과 모바일경험(MX)사업부장을 겸임하며 직접 주요 사업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이번 인사는 예상보다 소폭으로 단행돼 사장 승진자도 1명에 그쳤다.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이 현 사장단 체제를 지지하고 지금 방향대로 밀고 나가라는 뜻을 전달한 셈”이라고 전했다. 최근 3년 삼성전자의 사장 승진자는 총 11명이다. 2023년 7명에 이어 2024년 2명, 2025년 2명 등이다. 경영진 교체가 순차적으로 이미 이뤄진 만큼 추가 교체 필요성이 낮아졌다는 해석도 있다.
노 사장이 올 3월 DX 부문장 직무대행을 단 지 8개월 만에 대표이사로 올라선 것은 인공지능(AI) 역량을 전 사로 확산시키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노 사장은 2020년부터 MX사업부장을 맡아 ‘갤럭시 AI’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올 8월 DX 부문 타운홀 미팅에서 “AI를 중심으로 비즈니스 근본을 혁신하고 AI 기반 혁신 기업(AI driven Company)으로 거듭나겠다”고 강조했다.
내년 메모리 사업의 지휘봉도 전 부회장에게 다시 맡겨졌다. 전 부회장은 메모리사업부장을 겸직해 안정적인 사업 경쟁력 강화에 무게를 실을 수 있게 됐다. 지난해 5월 ‘반도체 구원투수’로 등판한 전 부회장은 고대역폭메모리(HBM) 부진으로 위기에 봉착한 메모리사업부를 직할하며 반도체 사업 전반을 이끌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최근 5세대인 HBM3E 12단 제품의 엔비디아 공급을 확정했고 6세대 HBM4 납품도 초읽기에 돌입했다. DS 부문은 올 3분기 7조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고 4분기에는 10조 원 이상의 수익을 기대하는 등 실적 개선 흐름이 뚜렷하다.
특히 이 회장은 AI와 반도체에서 HBM 등을 넘어설 미래 선행 기술 확보를 위해 하버드대 석학을 영입하며 ‘기술의 삼성’을 거듭 내세웠다. 서울대 전체 수석 졸업 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박홍근 SAIT(옛 삼성종합기술원) 사장은 1999년 32세의 나이에 하버드대 화학과 조교수로 임용된 천재 과학자다.
하버드대 화학과와 물리학과에서 강의와 연구 활동을 해온 박 사장은 뉴로모픽(Neuromorphic) 반도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이기도 하다. 이 회장의 파격 인사는 삼성전자가 그래픽처리장치(GPU)와 HBM을 중심으로 AI 학습과 속도 경쟁에 집중하고 있는 현재의 반도체 생태계를 넘어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현재 사용되는 반도체는 ‘중앙처리장치(CPU), 메모리,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폰노이만 구조다. 입력된 정보를 순차적으로 처리하는 CPU는 입력과 연산을 동시에 수행할 수 없어 데이터 병목현상이 벌어지기 때문에 AI 학습과 추론에는 GPU와 초고성능 D램인 HBM이 사용된다. 뉴로모픽 반도체는 폰노이만 구조를 해결할 기술로 꼽힌다. 인간 뇌의 뉴런 구조를 닮은 반도체로 AI를 넘어 인간과 생체적으로 호환할 수 있는 궁극의 기술로 평가된다. 이 분야의 석학인 박 사장은 SAIT 원장을 맡아 AI 반도체 생태계의 패러다임을 바꿀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회장은 또 윤장현 삼성벤처투자 부사장을 DX 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 겸 삼성리서치장 사장으로 승진시켜 신기술 개발과 인수합병(M&A) 두 축으로 미래 사업을 준비한다는 구상을 시사했다. 소프트웨어 전문가인 윤 사장은 삼성벤처투자 대표로 일하며 전 세계 최신 기술 동향과 글로벌 자본이 투자를 원하는 신기술을 꿰뚫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윤 사장은 M&A 전문가면서 최신 기술에 대해 해박하다”며 “선단 기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리서치의 방향을 잡게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인사는 예상과 달리 소폭으로 이뤄졌다. ‘삼성 2인자’로 불리던 정현호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박학규 사장을 초대 수장으로 하는 사업지원실이 출범하면서 대대적인 세대교체와 조직 개편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했다. 재계에서는 아직 임원 인사와 조직 개편이 남아 있어 삼성전자의 변화에 여전히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삼성전자가 정기 인사 이후에도 연중 수시 인사를 단행할 것이라고 예고한 점도 변수다. 삼성의 전자 계열사 사장들인 장덕현 삼성전기 사장, 이청 삼성디스플레이 사장, 최주선 삼성SDI 사장 등도 유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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