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루이 16세의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나폴레옹 1세 부인인 조세핀의 공통점은 프랑스인이자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여인들이라는 점 외에 보석 기업 멜르리오디멜르의 고객이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멜르리오디멜르는 1515년 문을 열어 프랑스 왕실과 귀족을 주고객으로 하며 발전해왔고 지금은 유럽·중동의 최상층 부호 등 VVIP를 고객으로 하는 주얼리 업체다. 종업원이 50여명에 불과하지만 최상층 부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지난 500년 간 같은 제품을 만든 적이 없을 정도로 장인정신이 투철하며 자기만의 시장을 확보한 명품기업이다.
53회 무역의 날을 맞은 오늘 우리 무역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지난 70년대 수출드라이브 시기부터 우리 기업들은 선진기업의 혁신을 빠르게 수용해 압축 성장을 이뤄내며 한국을 무역 강국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창조적 경험 지식을 바탕으로 한 역량을 축적하지 못했고, 이는 한국경제를 선진국 문턱에서 수년째 묶어 놓고 있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세계 경기 저성장에 따라 수출은 최근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고 주력 산업 전반에 걸쳐 활력이 떨어지면서 위기에 노출되었을 때 취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화장품, 의약품,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등 소비재 및 고부가가치 제품의 수출이 전반적인 수출 부진 속에서도 호조를 보이며 우리 수출상품의 명품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가까운 미래에 4차 산업혁명의 도래로 산업, 경제, 생활양식에까지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예고되고 있어 우리를 둘러싼 불확실성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위기가 팽배하고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시대에 단기적이고 대증적 요법으로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고칠 수 없다. 오히려 지금의 위기를 빨리 극복해야 한다는 조급증을 내려놓고 좀 더 긴 안목과 긴 호흡으로 우리 수출의 구조를 개선하고 제품과 서비스를 명품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멜르리오디멜르가 빠른 성장과 당장의 성과를 위해 외형을 확장했다면 과연 500년 간 살아남으며 지금의 명품기업의 면면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물론 혁신을 거듭하며 장수하는 GE같은 대기업도 존재하지만 성장만을 추구하다가 본연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민첩하게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사라져간 기업들이 수없이 많다. 오늘날 같이 디지털 경제가 확산되고 시장파괴가 일상화되고 있는 지금 기존의 대기업 중심의 규모의 경제를 통한 비용 절감, 수직계열화, 단계적인 혁신 등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기업들이 강점을 보이던 표준화된 상품 생산, 범용중간재 수출은 레드오션이 되어가고 있고 신흥국의 기술 추격으로 우리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세계시장에서 지속적인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장 선도자(First Mover)’로 차별화된 기술·마케팅 역량을 갖추고 혁신과 융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미 우리 기업 중에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특화된 기술과 창의적 아이디어로 세계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기업들이 많다. 대기업 보다 앞서 대형전지부문에서 기술을 쌓아 세계시장에서 프리미엄 제품으로 인정받는 기업도 있으며 사양산업이라 인식되던 신발산업에 혁신 기술과 아이디어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기업도 있다. 대중성과 창의성 그리고 시대에 맞는 마케팅으로 세계인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K-팝 역시 차별화된 역량으로 자신만의 시장을 구축하고 있는 사례다. 이러한 기업, 제품, 서비스가 전 산업으로 확산되고 성공사례들이 더 많이 늘어나야 우리 경제가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시간 우리는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모방과 빠른 습득을 통해 높은 성장을 하며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했다. 이제는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한 걸음 늦게 가더라도 내실을 다지고 기술과 역량을 축적해나가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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