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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나 관공서의 오래된 문서 작성 규정을 보는 듯한 이 양식은 놀랍게도 2025년 4월 현재 진행중인 정부 주최 학생 과학 대회 보고문 제출 양식이다. 전국 초중고 학생들이 참여해 과학적 문제 해결 능력과 창의력을 겨루는 행사인데, 대회 시작도 전에 학생들은 고정된 틀부터 강요받는다.
주최 측은 심사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위한 조치라고 설명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과학과 창의성을 내세운 학생 대회에서 시작부터 ‘틀에 맞추기’를 강요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다양한 생각과 발상이 자유롭게 발휘돼야 할 공간에 정해진 형식을 먼저 들이대는 방식이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다.
대회 출품 가이드라인을 살펴보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기초과학 및 응용과학 분야에서 창의성과 학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 △산업기술 개발 및 생활의 과학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작품 △환경·보건 등 복지 분야에 기여할 수 있는 작품 등이다. 지나치게 모호하고 과중한 조건이다. 성인 과학자나 전문기술인조차 주저할 만한 기준을 어린 학생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규정이 십수 년째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매년 4월 과학의 달마다 관성적으로 되풀이된다. 타성에 젖은 어른들의 무성의와 그 무성의 속에서도 기발함을 요구받는 학생들의 모순된 현실이 반복된다.
과학기술이 분초 단위로 세계를 바꾸는 시대다. 그러나 한국의 과학교육 정책은 여전히 학생들에게 불친절하고 가혹하다. 체계적인 과학교육 커리큘럼도, 섬세한 지원 체계도 없이 학생들에게 ‘자기주도적’ 탐구와 ‘성과’를 요구한다. 결국 교육 당국이 설정한 높은 기준을 충족하려면 타고난 영재이거나 값비싼 사교육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과학을 좋아하지만 영재는 아닌 아이들은 점차 과학교육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는 더 큰 혼란이 기다린다. 교육 당국이 수년째 이어진 의대 쏠림 현상에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학생들은 성적이 좋든 아쉽든, 과학을 좋아하든 아니든, 결국 ‘의대냐 아니냐’를 놓고 전공 선택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몇 번의 허들을 넘어 과학도가 된 후에도 외로움과 불안은 계속 따라붙는다.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이 올해 3월 발표한 ‘과학기술 인재개발 활동조사’에 따르면 이공계 대학 연구원의 97.4%가 학업을 마친 후 전공 관련 분야로의 진출을 희망했지만, 전공 관련 취업 기회가 부족하다고 답한 비율이 50.0%에 달했다. 과학기술 인재 상당수가 미래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 겪고 있는 금전적 어려움도 가볍지 않다. 이들이 꼽은 가장 시급한 정부 지원책은 ‘연구개발(R&D) 비용 및 연구비 지원 확대(21.9%)’였으며 이어 ‘학비·장학금 지원(8.6%)’ ‘기타 금전적 지원(8.5%)’ 순으로 나타났다. 과학기술인이 되기 위해 긴 시간을 투자하고도 생계와 연구 환경 모두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취업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정부 산하 연구기관에 몸담은 과학기술인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구 환경의 불안정성을 체감한다. 정치적 변화로 조직 분위기가 흉흉해지거나, 예산 삭감으로 수행하던 연구를 중단해야 하는 경우가 반복된다. 어느 순간 연구보다 보고서 작성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 자신을 자조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과학기술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순간들은 그렇게 쌓여간다. 한국에서 과학기술인의 길을 간다는 것은 말 그대로 ‘행로난(行路難)’이다.
정부는 올해도 과학기술 인재양성에 9조 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수준의 지원을 기대할 수는 없더라도, 공교육 초기부터 더 많은 학생들이 과학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친절한 길을 열어야 한다. 과학기술인의 길에 오른 후에도 불친절과 불안, 불확실에 시달리게 해서는 안 된다. 미래의 편리를 위해 과학기술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정작 이들의 길이 어렵고 불안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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