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서민·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한 역대 최대 규모의 신용사면을 단행했지만 금융계에선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재기 기회 지원한다는 취지는 공감하지만 악성 채무자들의 이용이 늘면서 잠재적 부실 위험이 확대될 수 있다는 걱정이다. 취약층의 가처분 소득이 늘지 않는 한 연체라는 악순환을 끊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30일 소액 연체 채무를 전액 상환한 서민과 소상공인 257만 7000명에 대한 신용사면 조치를 단행했다. 2020년 1월부터 올 8월까지 5000만 원 이하의 빚을 연체했다가 올해 연말까지 연체금을 모두 상환한 개인·개인사업자가 대상이며, 아직 빚을 갚지 못한 112만 여명도 연내 모두 상환하면 신용회복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정부는 신용사면을 통해 취약층의 금융 접근성이 좋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29만 명이 신규로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고, 23만 명이 은행권 신규 대출 평균 평점을 웃도는 신용점수를 보유하게 될 것으로 추산했다. 금융 업계 입장에선 기존 카드 발급이나 대출 이용이 어려웠던 취약층을 고객으로 끌어올 수 있다.
그러나 금융 업계 입장에선 간단치 않은 문제다. 가장 큰 문제는 ‘깜깜이 심사’다. 기존에는 빚을 다 갚아도 연체 이력 정보가 신용정보원과 신용평가사에 각각 1년, 5년간 남게 됐다. 은행, 카드사 등은 이 정보를 활용해 한도, 금리 등을 산정할 수 있지만 이번 사면으로 악성 채무자들 선별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을 잃게 됐다.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대출 금리와 한도를 심사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연체 경험의 유무”라며 “깜깜이 심사가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카드사 관계자도 “신용사면을 통해 카드를 신규로 발급 받는 이들의 한도는 소액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면서도 “연체 기록이 사라지면 회가 자체 데이터베이스(DB) 이외에 상습적인 악성 채권자들을 선별할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2금융권 전반은 이미 건전성 관리에 빨간불이 들어온 상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현재 카드사 총채권 연체율은 1.76%로 지난해 말(1.65%) 대비 0.11%포인트 상승했다. 2014년 말(1.69%)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국내 상위 20개 저축은행들의 신용대출 연체율도 2021년 5월 3.42%에서 지난 5월엔 5.63%까지 증가하며 건전성 관리를 요구받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불경기와 고금리 추세로 인해 빚을 제때 갚지 못하는 한계층이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신용사면 발 리스크까지 더해진 셈이다.
금융사의 부실 문제를 넘어선 역기능에 대한 걱정의 목소리가 크다. 300만 명이 넘는 인원에 대한 신용사면이 이뤄질 경우 신용점수 인플레이션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금융위가 올해 8월 말까지 연체액을 모두 상환한 차주들에 대한 신용회복 지원 효과를 분석한 결과 개인 신용평점은 평균 40점(616점→656점)씩 개선될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20대와 30대의 평균 신용점수는 각각 50점, 42점씩 올랐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지금도 1금융권을 찾는 고객 중 1등급이 아닌 분을 찾기가 더 힘든 상황”이라며 “신용사면으로 대출 문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신용사면이 취약 차주들의 재기를 지원하는 근본적 해법이 되기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크다. 금융권 창구에서 밀려났던 취약층들의 접근성이 일시적으로 회복될 수 있겠지만 결국 가처분 소득이 늘어나지 않는다면 또다시 연체라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현영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신용사면은 장기적 관점에서 성실 상환 유인을 약화해 금리 상승 및 채무불이행 빈도를 증가시킬 수 있어 한정적 시행이 바람직하다”며 “금융 수단뿐 아니라 고용 등 소득 여건 자체를 개선할 수 있는 정책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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