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준비는 단순히 ‘얼마를 모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장수 리스크, 시장 변동성, 예기치 못한 지출 등 불확실성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종합 설계다. 맥린자산관리 이사 웨이드 파우의 책 ‘은퇴 계획 가이드북’은 이를 관리하는 원리를 제시하며, 그 핵심은 한국의 퇴직연금·개인형퇴직연금(IRP)·생애주기펀드(TDF) 제도와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은퇴 위험은 세 가지 축에서 발생한다. 기대수명보다 오래 사는 장수 위험, 은퇴 초반 시장 충격이 평생 자산을 갉아먹는 수익률 순서 위험, 돌발 의료비나 가족 지원과 같은 예상치 못한 지출 위험이다. 한국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최고 수준의 기대수명을 기록하고 있고, DC·IRP 제도로 투자자가 직접 운용해야 하는 비중이 커 시장 변동성에 따른 충격도 크게 체감된다.
TDF는 이에 대응하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투자자가 은퇴 시점만 정하면 자동으로 주식·채권 비중을 조정해주며, 은퇴가 다가올수록 위험 자산을 줄여 변동성을 완화한다. 이는 ‘시장 상황에 따라 지출을 유연하게 조정하라’는 파우의 조언을 TDF라는 자동화된 자산배분 장치가 대신 구현해주는 셈이다. 실제로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 제도에서 TDF가 핵심 축으로 자리 잡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IRP는 세제 혜택과 과세 이연 효과를 동시에 제공하는 핵심 수단이다. IRP 세액공제를 적극 활용하고, 은퇴 이후 분리과세(3.3~5.5%) 구간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면 ‘세금 최적화’와 동일한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퇴직연금과 IRP는 단순한 계좌가 아니라, 은퇴 후 세후 소득을 극대화하는 도구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민연금 수령 전략 역시 파우의 조언을 한국 현실에 맞게 적용할 수 있다. 국민연금을 조기 수령하면 월 지급액이 줄어들고, 연기 수령하면 최대 36%까지 늘어난다. 은퇴자산 규모, 건강 상태, 배우자의 연금 수급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국민연금∙퇴직연금·IRP·TDF의 흐름을 조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은퇴는 단순히 돈만의 문제가 아니다. 은퇴 이후 삶의 질은 건강, 관계, 의미 추구와 같은 비재무적 요소에서 결정된다. 이를 지탱하려면 재정적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한국 투자자에게 그 기초는 국민연금이라는 사회안전망 위에 퇴직연금·IRP·TDF라는 세 축을 얼마나 현명하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사회다. 평균수명은 늘어나는데 은퇴 준비는 여전히 부족하다. 파우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은퇴는 ‘하나의 정답’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각자의 성향에 맞는 전략, 위험을 분산하는 구조, 세금과 제도를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퇴직연금·IRP·TDF를 중심으로 은퇴 설계의 기본기를 튼튼히 세우는 것, 그것이 한국형 은퇴 해법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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