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시중은행들이 경영난을 겪고 있는 여천NCC에 대한 일반 대출을 최근 2년 새 절반 가까이 줄인 것으로 확인됐다. 여천NCC는 대주주의 긴급 수혈 덕에 가까스로 부도 위기를 넘겼지만 은행들이 추가 지원을 꺼리고 있어 자금난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13일 금융계에 따르면 KB·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은행의 여천NCC에 대한 일반자금 대출 잔액은 11일 기준 1291억 원으로 지난해 1월(2446억 원) 말보다 47.2% 급감했다. 한국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을 포함한 전 은행권으로 범위를 넓히면 같은 기간 대출 잔액은 35.2% 줄었다. 국책은행의 대규모 자금 지원에도 급격한 자금 이탈을 막지 못한 셈이다.
은행들은 일반자금 대출의 만기도 앞당긴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에는 전체 대출 중 만기가 6개월 이하인 단기 대출 비중이 32.5%에 그쳤는데 올 들어서는 41.7%로 9.2%포인트 높아졌다. 반면 만기가 2년을 넘긴 장기 대출 비중은 지난해 32.3%였는데 올해는 0%다. 만기를 짧게 잡아 회수 가능성을 높인 것이다.
이는 은행들이 여천NCC에 대한 자금을 보수적으로 취급하기로 방향을 잡은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은행들은 대출 만기가 돌아오는 대로 상환을 요구하거나 신규로 자금을 내주더라도 만기를 가능한 짧게 설정하는 식으로 자금을 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시중은행의 여신심사 담당 임원은 “여천NCC에 대한 대규모 증자가 이뤄지지 않으면 상황이 안 좋아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며 “별다른 이슈가 없었다면 만기가 돌아온 대출 규모만큼 신규 대출을 내줬을 테지만 이번에는 상환만 받았다”고 설명했다.
일반자금 대출에 비해 상대적으로 떼일 위험이 적은 무역금융인 유전스(Usance)의 취급액을 확대했다. 은행권의 총 대출채권(일반자금 대출+유전스 등)에서 유전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8월 44.2%로 지난해보다 14%포인트가량 늘었다. 유전스는 은행이 수입 자금이 필요한 기업에 실행하는 일종의 단기 무역 대출 상품으로 일반대출과 달리 자금 용처가 분명하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일반자금 대출은 꼬리표가 붙지 않는 자금이다보니 기업이 어디에 돈을 쓸지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면서 “특정 기업의 리스크가 커지면 총 익스포저 한도는 유지하되 일반자금 대출 비중을 조절하는 식으로 리스크를 줄인다”고 설명했다.
시장에서는 여천NCC의 경영난이 해소되지 않고 있는 만큼 은행권의 자금 이탈 규모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새어 나온다. 여천NCC는 한화그룹과 DL그룹이 50대50으로 합작해 만든 석유 회사로 2017년 영업이익 1조 원을 넘어서는 등 업계 선도 기업 중 하나였다. 하지만 중국발 저가 제품 공세에 불황에 빠지면서 올 1분기에만 498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석유화학 업종 특성상 원료 수입에 대규모 자금이 드는 데다 중국과의 경쟁을 피하려 고부가가치 제품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바꾸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만큼 자금난이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실제로 시중은행을 포함한 상당수 채권단들은 여천NCC에 대한 익스포저를 점진적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채권단의 관계자는 “일시적으로 부진을 겪고 있는 업종이라면 모르겠지만 석유화학 업종은 구조적 문제에 직면한 상황”이라며 “자칫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꼴이 될 수 있어 신규 자금을 지원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자금난은) 회사 주주들이 풀어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사상 최대 실적 행진을 이어가는 은행들이 취약 산업에 발을 빼는 행태를 두고 “비 올 때 우산을 뺏는 행태”라는 말도 나온다. 석유화학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은행들이 발을 빼기 시작하면 시장에서 자금을 구하기 더 어려워진다”면서 “대출 연장이 만능 처방은 아니지만 위기를 더 키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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