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출범한 이재명 정부 앞에는 경제적 난관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0%대로 추락할 가능성이 높고 인구절벽과 산업 혁신 저하, 계층 간 양극화 확대 등 다양한 구조적 문제까지 껴안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의 통상정책도 언제든 터져나올 수 있는 돌발 변수다. 새 정부가 취임 첫해 0%대 성장률로 출발하는 것도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인 김대중 정부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경제신문은 해외 투자은행(IB)에서 근무하며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 천착해 정책 제언을 해온 여성 거시경제 전문가인 캐슬린 오 모건스탠리 아시아·홍콩 지사 한국·대만 선임이코노미스트에게 한국 경제의 위기 상황과 새 정부가 내놓을 수 있는 해법에 대해 질문했다.
오 선임이코노미스트는 5일 “한국 경제가 저성장 시기에 진입한 만큼 인구·산업·노동 전반에 걸친 구조 개혁을 본격적으로 모색해 ‘넥스트 리폼(개혁)’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며 “단기적으로 경기 부양을 위해 확대 재정은 불가피하지만 직접적인 현금 지급보다는 성장 효과가 더 큰 산업·인프라 투자 성격의 재정지출 비중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 선임이코노미스트는 우선 외국인투자가들이 한국의 구조 개혁에 대한 상당한 기대감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은 이미 제조업 기반의 숙련 노동력을 바탕으로 안정된 국가 인프라 및 성숙한 경제 환경을 갖추고 있어 저성장에 대응하기 위한 경제 개혁을 속도감 있게 밀어붙인다면 다시 한번 성장의 사다리에 올라탈 수 있다는 의미다.
오 선임이코노미스트는 “외국인들은 한국이 구조 개혁에 대한 정책 집중도가 높고 사회적 컨센서스도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 인식하고 있다”며 “변화 속도가 느린 일본이 이미 기업 지배구조 개혁을 통해 증시 부양 효과를 낸 것처럼 아시아에서 그다음 개혁이 가능한 시장은 한국이라는 시선이 강하게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그가 구조 개혁의 핵심으로 꼽는 분야는 인구다. 인구 고령화·저출생에 따라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이 추세적으로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내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잠재성장률이 2%에 못 미치는 1.98%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2017~2026년 10년간 한국의 잠재성장률 낙폭은 1.02%포인트(3%→1.98%)로 OECD 회원국 중 일곱 번째로 크다. 최근 저출생 추세가 다소 회복되는 분위기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 정부 안팎의 중론이다.
오 선임이코노미스트는 “인구 개혁이 기반이 돼야 산업·노동·교육 개혁 등도 도모할 수 있는데 한국은 지난해부터 초고령 사회에 진입해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심각한 인구문제에 직면한 상황”이라며 “새 정부는 역량 높은 전문가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효율적인 대책을 내놓아 개혁의 모멘텀을 지속적으로 끌고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출산 인식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20~30대는 출산과 육아에 대해 긍정적이지만 주거 및 재정 문제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며 “작게는 육아 유연근무 확대, 나아가 지방 및 저소득 가정이 출산할 경우 아이 한 명당 평균 연봉 2배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파격 대책 등을 강구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 산업 전반에 대한 구조 개혁도 강조했다. 오랫동안 한국 제조업을 이끈 주력 수출 업종은 미국발(發) 고율 관세와 중국의 초저가 공세에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에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탄탄한 산업군을 지원하면서 최근 들어 새롭게 부상하는 신산업 육성책을 병행 추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지난 60년간 한국 수출을 떠받쳐온 산업 중 여전히 경쟁력이 있는 분야로 인공지능(AI) 반도체, 전기 배터리 및 소재, 방산, 해외 건설 및 자재, 조선 등 5개를 꼽을 수 있고 음식·화장품·미디어·게임 등 4개는 중점 육성해야 하는 신사업으로 분류할 수 있다”며 “이들 9개 산업을 ‘넥스트 돌파구’로 지정해 집중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들 산업에 특화한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면 적극 집행하고 노동시간 규제 철회나 법인세 인하 등의 파격 정책으로 사업 환경 개선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는 게 오 선임이코노미스트의 제언이다.
당장 현실로 다가온 0%대 저성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단기적으로는 새 정부가 재정 확대 기조를 펼칠 필요가 있다는 제언도 내놓았다. 이재명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최소 ‘20조+α’원 규모의 2차 추가경정예산 편성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다음 달 초 국회 본회의 통과를 목표로 이달 추경 편성 절차를 마무리하는 속도전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바닥까지 추락한 내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지역화폐 발행 등 민생 회복 분야에서 지출이 가장 클 것으로 전망된다.
오 선임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처럼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경제성장률이 2%를 넘기면 재정 건전성을 강조할 수 있겠지만 올해와 내년은 상황이 많이 달라 확장 재정의 역할이 중요한 때”라며 “미국 행정부의 관세정책 불확실성이 해소될 때까지를 고려하면 최소 내년까지 확장 재정은 충분히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미 시장에서는 30조 원 안팎의 추경을 전망하고 있으며 내년 본예산도 최소 8~9% 정도의 증가율을 나타낼 가능성이 크다. 이는 최근 3년간 연평균 본예산 증가율 3.7%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다만 그는 추경의 규모보다 지출의 성격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민간에 직접 현금을 지급하는 이전지출보다는 정부 소비나 정부 투자가 성장에 더 기여하는 만큼 취약 계층 및 자영업자 지원과 함께 산업·인프라 투자 성격의 재정지출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정부가 직접 재화를 사는 정부 소비나 사회간접자본(SOC) 건설 등 정부 투자의 재정승수는 각각 0.85, 0.64인 반면 긴급재난지원금 등 정부가 민간에 직접 현금을 지급하는 이전지출은 0.2에 불과하다. 똑같은 금액의 재정을 집행했을 때 정부가 직접 소비나 투자를 하는 것이 현금을 뿌려주는 것보다 경제성장에 미치는 파급력이 더 크다는 것이다.
오 선임이코노미스트는 “확장 재정을 펼치되 추경 규모를 GDP의 1~2%를 넘어서지 않게 조절하는 등 과도한 지출 규모는 지양해야 한다”며 “정부 부채 비율이 지난 10년간 OECD 국가 평균보다 늘어나면 신용등급 강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GDP 대비 부채비율(일반 정부 부채 D2 기준)은 52.5%로 미국(120.8%)을 비롯해 프랑스(113.1%), 영국(101.2%), 일본(236.7%) 등과 비교해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기업과 가계의 부채 비중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높고 정부 부채마저 불어나는 속도가 빨라 결코 안심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향후 기준금리에 대해서는 한국은행이 당분간 금리 인하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했다. 한은은 올 5월 기준금리를 연 2.75%에서 2.5%로 0.25%포인트 내린 것을 포함해 지난해 11월 이후 4차례 인하했다.
하지만 올 연말까지 2.0% 수준을 밑도는 과도한 금리 인하는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한은이 5월 수정 경제 전망을 통해 올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5%에서 0.8%로 끌어내렸지만 2차 추경 요소를 반영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오 선임이코노미스트는 “한은이 경기 비관론적 입장을 보였지만 새 정부 출범 이후 편성될 가능성이 있는 추경 경기 부양 효과를 전망에 반영하지 않았다”며 “이를 고려하면 메시지가 지나치게 비둘기파(완화적 통화정책 선호)적 입장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모건스탠리는 올해 말까지 한국의 최종 금리 수준을 2%로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오 선임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글로벌 자산시장에서 ‘미국 예외주의(어떤 상황에서든 미국 자산 강세)’가 도전받고 있다며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전쟁이 시작된 후 미국 국채금리가 오르고 달러 가치가 하락하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최근 중국·대만 등 아시아 국가의 AI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아시아 시장으로 자산 재배치가 이뤄지고 있다”며 “한국도 새 정부가 출범한 만큼 테크 분야 집중 투자 등을 적극 어필해 AI 리더십 국가로서의 가능성을 크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밖에 최근 하락한 한국의 금융시장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해 하반기 시행된 공매도 금지 연장 조치, 12·3 비상계엄 선포 등으로 커진 금융시장 리스크가 아직 해소되지는 않았다”며 “외국인들에게 다시 신뢰를 쌓을 수 있도록 환경 개선에 집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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