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X), 부스트업(O)’
최근 한 연구원에서는 밸류업이라는 용어를 부스트업으로 바꿨다고 한다.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 분위기 속에 코드 맞추기에 돌입한 것이다. 정책 기조가 이어지더라도 포장지를 갈아끼우겠다는 것은 이제 정말 대선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움직임의 하나다.
윤석열 정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해소를 목표로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정책을 꺼냈다.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밸류업 공시를 하도록 했고 관련 지수도 만들었다. 하지만 밸류업 공시를 실시한 코스피·코스닥 상장사는 152개에 불과하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밸류업의 전부가 마치 배당을 늘리는 주주 환원인 것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지기도 했다. 오히려 해외 기관투자가들이 가장 기대했던 배당소득 분리과세 같은 세제 지원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코스피 역시 박스피를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비상계엄과 미국발 관세 쇼크가 있었다고 해도 지금의 코스피는 1년 전보다 낮은 수준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회복과 성장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해 주가지수 5000 시대를 열겠다”고 제시했다. 1400만 개미(개인투자자)들이 혹할 수밖에 없는 얘기다. 쪼개기 상장 금지, 한 번이라도 주가조작에 가담하면 주식시장에서 영구 퇴출되는 ‘원스트라이크아웃제’ 등 불공정으로부터 개미투자자를 보호해 코스피 5000을 만들겠다는 기본 구상은 지난 대선 때와 유사하다. 눈에 띄는 것은 늘어난 국회 의석수만큼 ‘매운 맛’이 더해졌다는 부분이다. 대표적인 게 주주 충실 의무 도입 등 상법 개정안 재추진이다. 자사주를 원칙적으로 소각해 지배구조 투명성을 향상시키겠다는 내용 또한 추가됐다. 법과 제도 개정으로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면 주가 5000도 가능하다는 논리인 셈이다.
주주가치 제고라는 방향성 자체는 틀리지 않다고 본다. 지난해부터 밸류업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액티비즘(행동주의) 못지않게 소액주주들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고려아연의 일반 주주 배정 유상증자, 두산로보틱스와 두산밥캣의 합병,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규모 유상증자가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동이 걸린 것은 주주 반발과 언론의 지적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과거였다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넘어갔을 일이다. 상장사 사이에서 자사주 매입·소각 분위기도 조금씩 정착되는 추세다.
그럼에도 너무 급하다는 점에서 여기저기서 걱정이 끊이지를 않는다. 우리는 이미 주52시간제를 비롯해 과속 정책에 따른 폐해를 충분히 겪지 않았던가. 200석 가까이 확보한 민주당이 대권을 잡게 된다면 재의요구권(거부권)까지 갖게 돼 다음 총선이 열릴 때까지 3년간 견제 장치 없이 독주할 것으로 보인다. 주4.5일제, 노란봉투법, 상법 개정안에 대한 기업들의 우려는 괜한 것이 아니다. 최근에는 기업의 C레벨이 어떤 의사 결정을 하는지 들여다보는 ‘거버넌스 코드’가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 ‘당근’이나 단계적인 접근보다는 ‘채찍’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 보니 한 전직 관료는 “기업들이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 입법예고 기간을 1년 이상 둬야 한다”고 쓴소리를 했다.
국내외 할 것 없이 기관들은 미국 관세 쇼크의 여파로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0%대로 내다보고 있다. 굵직한 대기업들은 커지는 불확실성에 올해 투자 계획조차 제대로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주가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데 잠재성장률은 1%대까지 하락했다.
코스피와 미국 시장 간 커플링(동조화)에 투자자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미국 시장 지수부터 찾아본다. 영민한 젊은 투자자들은 상당수가 가상자산과 미국 주식으로 눈을 돌렸다. 투자자 다수가 장기·분산투자보다 레버리지·인버스 같은 단타에만 현혹됐다. 주가 5000 시대는 소액주주 보호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글로벌 경제 여건과 기업 펀더멘털 개선 등이 같이 움직여야 한다. 시장에 자금이 유입되려면 기업 활력을 높이고 외국인에게 매력적인 시장을 만드는 것이 우선 과제다. 국민들이 주식에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게 코스피 5000 시대를 여는 시작이 아닐까. 단, 과속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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