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기업 사장단이 9년 만에 긴급성명을 내고 “상법 개정 등 규제 입법보다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법안을 만들어달라”고 호소했다. 소액 주주 보호를 내세운 상법 개정안이 본래 취지를 벗어나 기업 경영에 혼란을 주고 해외 투기 자본에 공격 빌미를 줄 수 있다는 게 기업인들의 우려다. 특히 연 2% 성장률도 달성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 성장 동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상법 개정안이 자칫 산업 경쟁력 약화와 기업 가치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박승희 삼성전자 사장와 이형희 SK 수펙스추구협의회 위원장(사장), 김동욱 현대차 부사장, 차동석 LG 사장 등 16개 그룹 사장들은 21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한국경제 재도약을 위한 주요 기업 사장단 긴급 성명'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주요 기업들과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긴급성명을 낸 것은 2015년 이후 9년 만이다.
사장단은 우리 경제가 처한 극한위 위기 상황에 처해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1.4%를 기록했고 올해 성장률은 2% 초반에 그칠 것이다”며 "우리 경제는 이제 성장동력이 약화되면서 2% 성장률 달성도 버거워진 상황이 됐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내수는 가계부채 등의 문제로 구조적 침체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그나마 버텨주던 수출마저 주력 업종 경쟁력 약화, 보호무역주의의 확산에 따른 글로벌 환경 악화로 앞으로를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고 덧붙였다.
사장단은 이러한 상황에서 규제 입법보다 경제 살리기 법안에 힘써주기를 국회에 당부했다. 현재 22대 국회에선 상법 개정안, 상장회사지배구조법 제정안 등 기업지배구조 규제 강화 법안이 계류돼 있다. 특히 재계에서는 상법 개정안 중 이사의 충실의무와 관련해 주주의 이익이 추가되는 것이 기업 경영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사장단은 “현재 상법상 이사는 선관주의 의무 개념에 따라 회사에 대해서 충실할 의무를 지고 있지만 개정안이 통과되면 충실 의무 대상에 주주까지 들어가게 된다"며 “현실적으로 주주 구성은 매우 다양해서 모든 주주의 의견이나 권리를 균등하게 반영할 수 있는 방법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어 “주주에는 외국 투자자, 기관 투자자, 단기 투자자, 장기 투자자, 투기 자본이 섞인 투자자들도 있어 다양한 주주에 충실 의무를 지게 된다면 손해배상 소송이나 배임으로 형사고발을 당할 수도 있고 미국에서도 실제로 사례들이 나온 바 있다”고 지적했다.
각종 규제 정책이 정부의 밸류업 정책과 엇박자를 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사장단은 "이사 충실의무 확대 등이 포함된 상법 개정안은 소송 남발과 해외 투기 자본의 공격으로 이사회의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어렵게 한다"며 "신성장 동력 발굴을 저해해 기업과 국내 증시의 밸류다운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공동성명에 참여한 김창범 한경협 부회장 역시 “올해 상반기 내수 기업의 매출이 코로나 이후 첫 역성장일 정도로 어렵고 수출도 특정 기업 제외하면 빨간불 들어온 상황"이라며 "과연 이 시점에 상법 개정이 그만큼 우리에게 시급한 것인지, 또한 증시 하락의 원인이 경기침체가 아닌 지배구조의 문제는 아닌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상법을 개정하지 않아도 소액주주 보호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재계의 판단이다. 김 부회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기업 합병이나 분할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수 주주의 피해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상법 개정안이 아닌 자본시장법에서 사안별로 핀셋형으로 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며 “예를 들어 사업구조 개편을 위한 합병 시 기업의 실질 가치를 반영해 합병 비율을 산정하는 제도를 도입하거나 합병 시에 손해를 볼 수 있는 주주 권익을 보호하는 맞춤형 제도 등이 있다”고 말했다.
사장단은 또한 지금은 규제가 아니라 지원이 필요할 때라는 입장도 내놨다. 사장단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 과감한 규제개혁을 추진하고 각국이 첨단산업 지원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만큼 인공지능(AI) 반도체, 2차 전지, 모빌리티, 바이오, 에너지, 산업용 소재 등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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