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IMF(국제통화기금)에 있을 때 관심이 많아서 계속 유심히 들여다봤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위기를 겪지 않고 디레버리징(deleveraging·부채 축소)을 한 경우는 굉장히 드뭅니다.”
최근 가계부채 문제가 주요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4일 기자간담회에 참석에 이같이 발언했습니다. 이 총재가 중장기적인 디레버리징을 계속 강조하는데 ‘금융시장 충격 없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낮추는 데 성공한 나라가 있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이 총재는 “다른 좋은 사례가 없기 때문에 만들어 봐야겠죠”라고도 덧붙였습니다. 사실상 쉽지 않다고 고백한 셈입니다.
가계부채에 대한 우려가 커진 것은 가계, 기업, 정부 등 어떤 경제 주체든 과다한 부채는 경제 활동을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금융시장 전반의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정·통화 등 거시경제정책에도 부담이 됩니다. 인플레이션이 심각해 금리를 올리고 싶어도 부채가 너무 많다면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계가 진 빚이 많을 땐 경기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금리가 올라 원리금 상환 부담이 늘어난다면 소비가 위축되고 그러면 내수가 영향을 받으면서 다시 소득이 줄어들고 채무 부담이 증가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가계부채를 적정 수준으로 관리하는 것은 중요한 정책 과제로 꼽혀 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최근 몇 년 동안 몇 차례 집값 급등기를 거치면서 가계부채 비율이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그러다 2021년 8월 금리 인상 사이클이 시작된 이후 한동안 가계부채가 줄어드는 디레버리징이 진행됐는데 올해 4월부터 분위기가 다시 바뀌었습니다. 올해 초 정부의 부동산 규제 완화와 한은의 금리 동결, 특례보금자기론 등 정책 모기지 도입 등이 겹치면서 가계부채가 다시 늘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은행 가계대출은 주택담보대출을 중심으로 4월부터 증가 전환하더니 6월과 7월엔 각각 6조 원 가까이 급증하면서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이 총재도 이번 간담회에서 “가계부채가 지난 두 달 동안 예상했던 것보다 더 증가했다”라며 “정부의 규제 완화 등 미시 정책으로 부동산 시장이 연착륙 가능성이 커지고 금융안정도 많이 개선됐으나 반면에 기대하지 않은 효과로 가계부채가 두 달 정도 늘면서 상황이 변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총재는 “가계부채 비율이 통계적인 이유로 105%에서 101% 정도로 내려왔는데 그것이 100% 밑으로 가고 90%를 거쳐서 점진적으로 80%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기본적으로 목표”라고 말했습니다. 올해 1분기 기준으로 우리나라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1.5%입니다. 지난해 4분기 105.0%였는데 1분기 들어 부채 감소로 103.4%까지 낮아졌다가 새로운 회계기준(IFRS17) 도입으로 보험약관대출이 제외되면서 101.5%까지 1.9%포인트 떨어진 상태입니다.
문제는 이 총재도 말했듯이 가계부채 디레버리징이 쉽지 않다는 겁니다. 박양수 대한상공회의소 SGI 원장이 2012년 한은에 재직할 당시 대표 집필한 ‘부채경제학과 한국의 가계 및 정부 부채’ 보고서에 따르면 5가지 방법이 나옵니다. 디레버리징 해소 방법은 다양하면서도 대부분 경제 위기 수준의 부작용을 감수하거나 아예 현실화 가능성이 낮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긴축입니다. 경제 주체의 지출을 억제해 부채 증가율을 성장률 아래로 묶어두는 방식으로 부채의 절대 규모 자체를 줄이는 방식입니다. 다만 이 경우엔 소비·투자가 줄고 경기 침체로 경제 주체들의 부채 상환 능력이 더 악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고성장입니다. 부채를 줄이지 않으면서도 높은 성장을 통해 부채 상환 능력을 높인다는 이상적인 방법입니다. 문제는 수출이 급격히 늘어나는 등 상당한 행운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전쟁이나 오일붐이 일어났을 때나 가능했습니다.
세 번째는 파산 처리 또는 채무 재조정입니다. 민간·공공 부문의 경제 주체들의 파산을 용인하거나 채권자들의 합의로 부채 만기, 규모, 금리 등을 상환 가능한 범위 안으로 조정하는 방식입니다. 대신 파산이나 채무 재조정이 이뤄질 경우 신용이 훼손돼 장기간 상당한 비용 지불이 불가피합니다.
네 번째는 정부 부채로의 이전입니다. 민간 경제 주체들의 빚을 구제금융이나 경기부양책 등을 통해 정부가 떠안는 방식입니다. 정부 부채 수준이 높은 상황에서는 쓸 수 없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남유럽국가의 재정위기 등 국가 부도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지막은 고인플레이션입니다. 인플레이션으로 부채 실질 가치를 하락시키는 방식인데 이건 주로 정부 채무 부담을 줄이는 데 활용됩니다. 이건 대신 국제경쟁력 저하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기축 통화국인 아닌 경우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거나 외환위기로 직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돌아오면 이 총재는 부채가 더 늘어나지 않으면서 경제가 성장하면서 이뤄지는 디레버리징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는 “가계부채가 대폭 줄어든 경우는 보기 힘들다”며 “가계부채는 개인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대규모 조정이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 국제 비교를 통해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으냐면 가계부채가 너무 빠른 속도로 늘어나지 않게 하면서 경제 성장을 통해서 GDP 대비 비율을 떨어뜨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말도 남겼습니다. 이 총재는 “불황이 오면 제일 먼저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부동산 시장 띄우고 대출해주고 그래서 또 호황이 오면 좀 줄이다가 또 불황이 오면 또 (부동산 시장 활성화)하고 이런 건 어느 나라나 다 있기 마련”이라며 “지난 30년 경험이 다 그런 것 아니냐, 그럴 때 그런 유혹을 견딜 수 있느냐, 경제가 너무 침체해 제로 성장이 돼도 고치기 어렵다”고 강조했습니다.
최근 부동산 위기를 겪고 있는 중국 사례를 보면 중국 정부가 일정 부분 의도한 디레버리징의 과정이라고 평가하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레버리지를 통한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부동산 부양책 없이 구조조정을 진행할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렇지만 중국도 경제 상황이 더 악화된다면 부양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분석도 나옵니다.
“가계부채 연착륙시키는 것이 총재가 된 이유 중 하나”라고 깜짝 발언한 이 총재가 결코 쉽지 않은 디레버리징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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