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이 영국 반도체 설계 업체(팹리스) ARM에 대한 인수합병(M&A) 가능성을 시사한 가운데 협상 대상인 손정의(일본명 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이 거래 추진 사실을 곧바로 긍정했다. 재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인텔·퀄컴은 물론 최태원 회장이 이끄는 SK그룹과도 합종연횡식 협력을 추진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23일 블룸버그통신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소프트뱅크 대변인은 손 회장이 “이번 방문에 대한 기대가 크다”며 “삼성과 ARM 간 전략적 협력에 관해 논의할 예정”이라 말했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이 지난 21일 유럽·중남미 출장 귀국 길에서 “다음달 손 회장이 서울에 올 것”이라고 언급한 사실을 재차 확인한 셈이다.
소프트뱅크의 한국 자회사인 소프트뱅크벤처스도 서울경제의 e메일 질의에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다”며 같은 내용의 답변을 보냈다. 이 부회장이 영국에서 ARM 경영진과 M&A를 논의하는 대신 소유주인 손 회장과 담판을 지을 공산이 커졌다는 평가다.
ARM은 컴퓨터중앙처리장치(CPU)·스마트폰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에 설계자산(IP)을 공급하는 핵심 기업이다. 소프트뱅크가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다.
손 회장이 10월 한국을 찾게 될 경우 이는 2019년 7월 이후 3년 만의 방문이 된다. 이 부회장은 손 회장과 평소에도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서는 각국의 반독점 규제 장벽을 감안할 때 삼성전자가 단독으로 인수전에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ARM은 삼성전자·애플·퀄컴 등이 개발·판매하는 모바일 기기 칩 설계 부문의 90%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실제로 소프트뱅크는 2020년 ARM을 미국 엔비디아에 매각하려다가 미국·영국·유럽 경쟁 당국의 심사 문턱을 넘지 못했다.
천문학적인 인수 금액도 부담이다. 엔비디아가 인수전에 나섰을 당시 ARM의 몸값은 이미 반도체 업계 M&A 사상 최대 규모인 660억 달러(약 92조 원)까지 올라갔다. 여기에 최근 반도체 품귀 현상으로 ARM의 인수 대금은 100조 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삼성전자가 현재 보유한 현금성 자산 125조 원의 대부분을 투하해야 하는 수준이다.
이에 업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미국의 인텔·퀄컴, SK하이닉스 등에 손을 내밀 것이라고 전망한다. 컨소시엄 규모가 클수록 반독점 지위에 대한 의심을 해소하기 쉽고 중국계 기업을 제외하면 동맹 대상도 몇 없기 때문이다.
컨소시엄을 통한 단순 지분 투자 가능성도 점쳐진다. 각국 규제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방법인 탓이다. 다만 이 부회장의 반도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사회 구성 등을 통해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을 택할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론적으로는 삼성전자와 SK가 얼마든지 힘을 합칠 수 있다”며 “컨소시엄에서는 각 회사가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형태로 경영에 참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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