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 등 자동차 강국이 미래차 시대를 선도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는 전기차 전환을 위한 로드맵을 공개했고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오는 2030년까지 총 41조 원을 투자한다.
반면 우리 자동차 산업은 글로벌 공급망 붕괴와 원자재 가격 상승 등에 따른 부품 업체들의 수익성 악화로 줄도산이 벌어지면서 생태계 붕괴 위기에 처했다. 미래차 전환을 위한 그랜드플랜이 마련되지 않으면 자동차 생태계가 공멸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도요타는 14일 발표한 ‘탄소 중립 실현을 향한 전동화 전략’에서 2030년까지 30종의 순수 전기차 모델을 선보여 전 세계에 350만 대를 판매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2035년부터는 순수 전기차 모델만 판매한다. 하이브리드(HEV)·수소차(FCEV) 등 라인업 다양화로 탄소 중립을 도모하면서 중장기적으로는 순수 전기차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전기차의 핵심인 배터리 투자 규모도 1조 5,000억 엔(약 15조 5,000억 원)에서 2조 엔으로 늘린다.
바이든 미 행정부도 전기차 전환 로드맵을 실행하기 위한 전략 마련에 나섰다. 연방정부 전략에는 2030년까지 신차의 절반을 전기차로 교체한다는 목표를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담길 예정이다. 정부 간 협업 체계 구축을 위해 전기차자문위원회를 설치하고 전국적인 표준 지침을 내년 5월까지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미국 의회는 지난달 전기차 충전소 설치용 예산 75억 달러를 포함한 1조 2,000억 달러 규모의 인프라 예산 법안을 통과시켰다. AP통신은 “전기차 시장에서 중국을 뛰어넘는다는 게 바이든 정부의 목표”라고 전했다.
미국·일본과 달리 미래차 전환에 대한 세부 플랜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부품 업체들이 고사 위기에 처했다.
서울경제가 상장 부품 업체의 지난 3분기 실적을 분석한 결과 중견 부품 업체의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52.3%나 줄었고 중소기업은 98.8%나 급감했다. 수익성 악화로 일부 부품 업체는 법정관리라는 최악의 사태에 몰리고 있다.
정만기 자동차산업협회 회장은 “코로나19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경영이 악화되는 와중에 미래차 전환이라는 대 전환기까지 겹쳐 자동차 업계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며 “생산 유연성, 규제 개선, 정부 지원 등을 통해 기술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수출과 고용의 보고이자 미래 먹거리인 자동차 산업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전기차 등 미래차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산업의 실핏줄인 부품 업체들은 코로나19 이후 잇따른 악재에 미래차 전환은커녕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자동차 생태계의 핵심인 부품 업체가 흔들리면 우리 자동차 산업 전체가 흔들릴 수 있어 과감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4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올 들어 자동차 부품 업체의 경영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증시에 상장된 중견·중소 자동차 부품사 실적이 올 3분기 줄줄이 악화된 것이 이를 방증한다. 특히 3분기 상장된 중소 부품 업체 영업이익은 단 1억 원에 그쳤다. 코로나19와 미중 무역 분쟁 등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붕괴되면서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고 물류난에 운송비가 급증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여기다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으로 자동차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자 납품 물량까지 줄어들었다.
실제 내연기관차 부품인 액슬을 생산하는 국내 자동차 부품사 C사는 지난 10년간 해당 부품 매출이 거의 다 사라졌다. 지난 2012년 C사의 액슬 매출은 557억 원이었지만 올해는 3분기까지 50억 원가량 판매하는 데 그쳤다. 액슬은 타이어와 차체를 연결해 진동 및 충격을 흡수하는 부품이다.
알루미늄 다이캐스팅 공법으로 자동차 엔진 부품을 생산하는 K 사는 4년 만에 매출이 반토막이 났다. K 사의 올해 예상 매출액은 370억 원 수준으로 2017년(660억 원)보다 43% 하락한 수치다. 부품 업계 관계자는 “수익성 악화로 미래차 대비는 엄두도 못 내고 있다”며 “미래차 시대에 대비해 기술 인력을 확보해도 좋은 처우를 보장하는 곳으로 가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토로했다.
더 심각한 것은 단순한 수익성 악화를 넘어 도산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차·기아·한국GM 등에 브레이크 부품을 공급하는 HM금속이 파산 절차에 돌입하면서 아이오닉5와 제네시스 G80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 밖에 루프랙 제조 업체인 부품 업체 진원 등 3~4곳이 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차량용 반도체 품귀와 원자재 급등→자동차 생산 차질→부품 업체 수익성 악화 및 도산→미래차 준비 부족→완성차 경쟁력 악화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고 있다는 업계의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부품 업체의 붕괴는 고용 악화로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 6월 기준 국내 자동차 제조업 종사자 수는 37만 4,000여 명으로 2016년 대비 2만 명 줄었다. 부품 업계 종사자는 22만 8,000명으로 2016년보다 1만 5,000여 명 줄었다.
실제 이날 한국자동차산업협회가 발표한 ‘자동차업계 미래차전환 실태조사’를 보면 국내 부품 업체들의 미래차 준비는 사실상 전무한 것으로 나타났다. 협회가 9~10월 완성차·자동차 부품 업체 300개 사, 자동차 업계 종사자 4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를 보면 응답 업체의 56.3%는 전기차·자율주행차 등 미래차 분야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미래차 분야에 진출은 했지만 수익을 실현하지 못한 기업 비율도 23.7%였다. 미래차 분야에 진출하지 못했거나 했더라도 수익을 못 내는 기업이 80%에 달하는 셈이다.
이들 기업이 미래차로 전환하는 데 가장 큰 애로 사항은 역시 자금 부족이었다. 조사에 따르면 설비투자 관련 장애 요인으로 ‘자금 부족’이 77.9%로 가장 많았고, 수도권 규제 등 정부 규제(9.9%), 미래 불확실성에 따른 투자 결정 지연(9.2%)이 뒤를 이었다. 연구개발(R&D) 확대 애로 사항도 자금 부족(47.3%), 전문 인력 부족(32.1%), 기초원천기술 부족(13%) 등이었다. 특히 올해 자금 조달 여건이 전년보다 악화됐다는 응답이 절반에 가까운 46.3%에 달했다. 내연기관에서 수익을 내 미래차 전환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수익성 악화로 이마저 가로막힌 것이다. 자동차 업계의 관계자는 “현대차그룹 등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부품사들은 자금 부족과 인력 부족 등으로 미래차 시대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며 “부품사가 무너지면 국내 자동차 생태계가 근본부터 흔들리는 만큼 그랜드플랜이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자동차 부품 기업들의 줄도산으로 인해 완성차 업체들의 내년도 생산 계획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브레이크 부품 회사인 HM금속이 파산 절차에 돌입하자 대체 협력사 파악에 나섰다. HM금속은 현대모비스를 통해 현대자동차 아이오닉5, 제네시스 G80에 캘리퍼를 납품하고 한국GM의 스파크·다마스 등에도 부품을 조달하는 1차 부품사다.
한국GM은 다마스를 단종했고 스파크를 생산하는 창원 공장이 차세대 크로스오버유틸리티차량(CUV) 생산을 준비하고 있어 타격이 덜하다. 다만 현대차의 경우 1개월 후 상황을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약 한 달간은 HM금속이 파산 관련 이의제기 절차를 밟고 있는 만큼 차량을 정상 생산할 수 있지만 이후에는 다른 납품 회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캘리퍼는 차량마다 휠 크기가 다른 만큼 이에 맞춰 주물을 떠야 만들 수 있다. 단기간에 납품 회사를 바꿔 대처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납품 회사를 새로 찾는다고 해도 적어도 두세 달은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루프랙 부품 업체인 진원의 법정관리 역시 현대자동차와 쌍용자동차 등의 생산 계획에 영향을 주고 있다.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 들어가는 루프랙을 납품하는 회사인 진원은 최근 기업회생절차를 시작했다. 진원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현대차는 일시적으로 생산 차질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는 팰리세이드, 제네시스 GV70·GV80에 탑재되는 루프랙을 공급받기 위해 다른 회사를 물색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루프랙은 고도의 금형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부품이어서 생산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은 적다”면서도 “구매기획팀에서 대체 업체를 찾는 등의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짜고 있는 중”이라고 전했다.
자동차 부품사들이 줄도산한 결과 완성차 업체들이 택할 수 있는 대안도 줄어들고 있다. 국내 자동차 1차 부품사 수는 지난 2013년 898개에서 지난해 744개까지 감소했다. 올해 반도체 수급난이 본격화하고 수십 곳의 1차 협력사가 폐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완성차 업체의 생산 차질이 협력사 실적 부진으로, 협력사 파산이 완성차 생산에 악영향을 미치는 악순환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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