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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마케팅에 무릎 꿇다

2000년 구제역으로 수출 막히자 '삼겹살에 소주 한잔' 유행어 생겨

탄광촌 광부들이 즐기던 삼겹살 '미세먼지에 좋다' 속설로 이어져

상등품 대우받는 '마블링 한우' 의학적 관점서 보면 맞지 않아

닭은 밀집사육으로 전염병 잦아 '영계' 이름붙여 조기 출하하는 것





주말에 가족과 삼겹살 파티를 하기 위해 대형마트에 들른 서울 광진구의 이정미(48)씨. ‘삼겹살이 당긴다’는 딸과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즐기는 남편을 위해 나왔지만 살짝 고민이 된다. 유독 삼겹살이 다른 부위보다 갑절 이상 비싸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심 ‘(초)미세먼지에도 좋을 것 같고…’라며 가족들을 위해 삼겹살을 집어든다.

이처럼 삼겹살은 우리 생활과 밀접하다. 직장 회식문화에서도 빼놓을 수 없다. 지방 전통시장 중에는 아예 삼겹살 거리로 특화해 손님을 끄는 곳도 있다. 더욱이 미세먼지가 만성이 되다 보니 삼겹살이 미세먼지를 씻겨줄 것이라는 속설도 자리 잡았다. 이에 따라 돼지고기 중 공급이 부족한 삼겹살은 대량 수입하지만 등심·안심·뒷다리 등은 남아돈다. 축산농가도 일부러 돼지고기의 지방을 늘리기 위해 밀집사육을 하며 옥수수 등 고단백 사료 위주로 먹인다.

하지만 지방과 동물성 기름이 많은 고기를 구워 먹으면 몸에 부담이 된다. 지방이 많은 햄이나 소시지도 마찬가지다. 삼겹살을 오래 자주 먹은 50세 안팎의 직장인 중 뱃살이 늘어진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삼겹살을 연탄에 구워먹기도 하는데 연탄 자체의 유해가스도 있지만 연탄과 동물성 기름이 만나면 일부 발암성 연기가 배출된다. 이는 과거 농촌이나 공사판에서 석면이 있는 슬레이트에 삼겹살을 구워먹기도 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삼겹살이 미세먼지에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미세먼지는 입과 코를 통해 폐·혈관·뇌 등 온 몸을 휘감아 기관지질환을 유발한다. 오히려 지방 함량이 많은 음식을 과다 섭취하면 유해물질이 몸에 더 흡수될 수 있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 실내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 것도 금물이다. 윤수영 인천 한림병원 응급의학과장은 “미세먼지는 물을 많이 마셔야 어느 정도라도 씻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강고한 삼겹살 신화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물론 그전에도 삼겹살이 인기 메뉴 중 하나였지만 지난 2000년 발생한 구제역으로 돼지고기 최대 시장이던 일본으로의 수출길이 막혔을 당시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2003년부터는 3월3일을 ‘삼겹살데이’로 명명해 황금돼지의 해인 올해 17년째를 맞았다.

이 같은 마케팅 차원의 기념일은 흔하다. 여성이 남성에 초콜릿을 준다는 밸런타인데이(2월14일), 남성이 여성에게 사탕을 준다는 화이트데이(3월14일), 1자 모양으로 된 빼빼로 과자를 먹는다는 빼빼로데이(11월11일)를 들 수 있다.



삼겹살이 미세먼지에 좋다는 속설은 1970년대 탄광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지하에서 유해한 탄가루를 많이 마시던 광부들 사이에 ‘삼겹살로 유해물질을 씻어내자’는 분위기가 생겼고 이것이 오늘날 미세먼지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물론 삼겹살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100세 가까이 장수하는 노인 중 돼지고기를 삶아 먹는 것을 즐기는 이가 많다. 삶은 돼지고기가 장수의 비결 중 하나인 셈이다. 동물성 기름을 제거하고 영양소를 섭취하는 것은 몸에 좋다. 한국으로 삼겹살을 수출하는 네덜란드·칠레 등 유럽이나 남미에서도 대체로 지방을 제거하고 먹거나 살코기 위주로 즐긴다.

소나 닭도 돼지처럼 마케팅이 과학을 이긴 경우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름이 많은 즉, 마블링(marbling)이 많은 소고기가 ‘고기가 연하고 즙이 많이 나온다’고 해 상등품으로 대우받는데 이 또한 건강에 좋지 않고 세계적인 추세와도 맞지 않다. 밀집사육을 하며 출하시기를 일부러 늦춰 고단백 사료를 먹여 지방을 늘렸기 때문이다. 역으로 닭은 밀집사육 과정에서 전염병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발육이 다 되기도 전에 ‘영계’라는 미명하에 조기 출하한다. 서울 신당동의 허완 ‘유쾌한 약국’ 약사는 “삼겹살이나 마블링이 많은 소고기를 선호하는 현상은 건강 관점에서 보면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삼겹살 신화는 뇌의 반응을 과학적으로 측정해 소비자의 잠재의식과 행동을 분석하는 뉴로마케팅(neuron+marketing)과 궤를 같이한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를 눈을 감고 시음하면 뇌에서 동일하게 반응하지만 상표를 보여주면 신경중추가 활성화되며 코카콜라의 선호도가 높아지는 것과 같이 삼겹살처럼 익숙한 부위에 손이 간다는 얘기다.

뉴로마케팅은 뇌로 가는 피의 흐름이나 뇌파를 측정해 뇌 활동을 분석한다. 뇌와 신경 혈류 간 상호작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거나 눈동자와 머리가 움직이는 방향을 분석하기도 한다. 기아차가 알파벳 중 선호도가 높은 K와 승리를 뜻하는 7을 합성해 K7을 만든 것이나 일본 혼다가 뇌가 얼굴 형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점에 착안해 ASV-3 오토바이를 화난 사람처럼 디자인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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