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 너무 많은 것 쥐려하지 말고 자원 나눠 파괴적 혁신을
오너들 공격적 투자 유도하려면 IPO 기업 차등의결권 필요
경제구조 모방으로 선진국 추격할수 있어도 추월할 순 없어
스마트 패러다임에 올라 탈 우리만의 모델·경로 찾아나서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스. 마라톤 선수였던 그는 빠른 발로 그리스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와 거북이가 경주를 한다면 누가 이길까. 자명한 결론처럼 보이지만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제논에 따르면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 느린 거북이는 100m 앞에서 출발한다. 그를 쫓는 아킬레스가 그 지점에 도달하면 거북이는 그보다 조금 더 가 있다. 아킬레스가 다시 달려 거북이가 있던 지점에 도착하면 거북이는 다시 열심히 걸었던 만큼 그를 앞서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쫓고 쫓기는 상황이 무한 반복된다는 게 바로 '제논의 역설'이다. 논리의 비약 같지만 적어도 제논의 역설은 경제발전에서만큼은 그대로 적용된다. 후발국가는 선발국가를 쫓아가지만 선발자가 가까워질수록 추격 속도가 늦어지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21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이근(사진)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서울대 경제연구소장 및 슘페터학회장)는 "모방을 통해 격차를 좁히는 게 후발국가의 전략이지만 똑같은 방법으로는 선발국가를 넘어설 수 없다. 이게 우리나라가 여전히 일본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라며 "(일본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모방이 아닌 스스로의 방법·모델·경로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넘을 수 없는 일본, 이미 곳곳의 분야에서 우리나라를 추월하고 있는 중국. 창조적 파괴를 기치로 건 슘페터학회장이자 서울대 경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이 교수에게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갈 길을 잃은 대한민국 '신 넛크래킹'의 돌파구를 물었다.
-우리나라, 이제 따라가는 경제가 아니라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위치는.
△우리나라의 추격지수는 일본 대비 95%까지 왔다. 일본과의 격차를 5% 이내로 못 좁힐 줄 알았는데 조금씩 격차를 좁히고는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새로운 걸 해본 경험이 적어 (일본을 추월할) 능력이 안 된다. 일부 추월 사례가 있기는 하다. 대표적인 게 일본 소니를 넘어선 것이다. 계기는 디지털 TV의 출현이었다. 소니가 1988년 아날로그 기반 고화질 TV를 들고 나왔는데 한국은 디지털 기술로 가버렸다. 그렇게 새로운 경로로 가면서 한국이 소니를 넘어 디스플레이 강국이 된 것이다. 한국에 디지털 기술은 '기회의 창'이었던 셈이다. 메모리반도체나 휴대폰도 마찬가지다. 그런 게 많아야 일본을 넘어서는데 새로운 게 못 나오고 있다.
-중국의 추격이 무섭다.
△중국은 한국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다른 점도 있다. 한국은 제조업 리더가 안 바뀌는데 중국은 계속 바뀐다. 휴대폰이 지금은 샤오미와 화웨이지만 전에는 다른 기업이었다. 화웨이는 원래 이동통신 장비를 만드는 회사였다. 이런 기업들이 금방 올라오면 그전의 기업의 뒤처진다. 선두주자가 계속 바뀔 만큼 다양하고 역동적인 경제다. 그래서 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 같은 기업이 나오는 거다. 한국에는 그런 기업이 없다. 중국은 향후 먹거리 산업인 신재생에너지도 우리가 주춤하는 사이 먼저 선진화해버렸다. 두 번째 먹거리는 융합기술인데 우리는 규제 때문에 못하고 있다.
-제논의 역설을 말했다. 뒤집힐 확률은 있나.
△중국은 이제 한국을 경쟁 상대로 안 친다. 미국·일본은 본다. 기존 산업에서는 한국을 추격하고 있지만 선도산업은 이미 넘어서서 추월·비약하고 있다. 한국은 메모리 산업, 일본은 카메라 정도만 당분간 추격이 안 되는 분야일 것이다. 중국은 낙후 산업에서 우주선까지 산업 분야가 넓다. 대만은 중국에 완전히 졌는데 그나마 한국은 소수의 대기업 때문에 버티고 있다. 한화 같은 기업이 태양광 쪽에 대규모로 투자하면서 버티고 있다. 새로운 산업은 적자가 나기 마련이다. 반도체 산업도 7년 동안 적자가 나면서 삼성 전체가 무너질 뻔했다. 하지만 이후 사이클이 터지면 살아나는 거다. 중국은 예전에는 산업정책에 자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하면 된다는 걸 느껴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
-한국이 대만보다 나은 게 대기업 때문이라고 했는데 최근 대기업도 못 나선다.
△대기업이 기술은 있다. 시장 불확실성과 규제 때문에 잘 안되고 있는 거다. 무엇보다 장기적인 투자를 위해서는 오너십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기업이 추격형이 되기에는 이제 (대기업의) 거버넌스도 바뀌었다. 외국인 주주가 반이 넘으니까 단기적 성과에도 신경 써야 한다. 삼성도 이제는 과거처럼 못한다. 반면 구글은 어떻게 공격적으로 투자하느냐. 구글은 전형적인 과거 한국의 대기업 구조로 거버넌스를 바꿨다. 구글 알파벳이란 지주회사를 만들었는데 이게 한국의 재벌체제를 갖추고 있는 거다. 돈을 여러 군데 투자해야 하는데 가장 적당한 게 한국 재벌 식 체제다. 알리바바·테슬라도 지주회사를 만들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미국은 창업자가 지분에 비해 의결권이 많으니까 우주선도 쏘고 (투자를) 맘대로 하는 거다. 구글은 창업자에게 막대한 의결권을 주는 황금주를 허용해 주주 눈치를 덜 보고 적대적 인수합병(M&A)에도 덜 노출된다. 우리는 다 막혀 있다. 최소한 벤처기업이 증시 상장을 위해 기업공개(IPO)를 할 때는 차등의결권을 줘야 한다. 그래야 오너가 공격적으로 투자한다. 우리는 (기업이) 계속 지분을 신경 쓰느라 자사주 취득을 위해 거꾸로 주식 시장에 돈을 갖다 바치고 있다. 그러니까 성장을 갉아먹는 거다. 또 우리나라는 외국인 주주에게 너무 쉽게 의결권을 준다. 캐나다는 주식 보유 기간에 따라 의결권을 준다. 그게 합리적이다.
-규제에 막히는 것도 많다.
△정책 당국자들이 눈치를 보면서 다른 나라가 풀 때 규제를 푼다.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하는 것은 기업이 아니라 정책 당국자다. 한국에서는 기업이 퍼스트 무버 했다가는 '퍼스트 루저'가 된다. (규제 때문에) 제일 먼저 패자가 된다. 정부가 퍼스트 무버가 되면 기업도 너도나도 퍼스트 무버가 될 것이다.
물론 규제가 필요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친환경 플라스틱이다. 한국은 화학이 강한데도 옛날 플라스틱을 만들고 있다. 환경 플라스틱을 써야 한다는 규제가 없기 때문이다. 유럽은 이미 그 규제를 강화했다. 앞으로 기준에 도달하지 못 하면 수출을 못할 수도 있다. 정부가 하려고 하기는 했는데 기업이 부담된다고 해서 안 하고 있다. 그나마 중국이 안 찍고 있는 남은 산업인데. 한국 화학 산업은 '선발자의 함정(자기 상품이 최고라고 생각해 새로운 것을 무시하는 경향)'에 빠진 대표적인 분야다.
-또 어떤 산업을 유망하게 보나.
△휴대폰 같은 쇼트 사이클 산업은 추격하는 게 쉽지만 추격당하는 것도 금방이다. 삼성도 그걸 알기 때문에 롱 사이클 산업인 바이오 시밀러로 가려고 하는 거다. 바이오 시밀러는 후발자 입장에서는 기회의 창이다. 반도체랑 비슷하다. 의료기기도 유망 산업이다. 롱 사이클 산업인 의료기기는 정보기술(IT)이 나오면서 미디엄 사이클 산업으로 바뀌었다. 삼성에는 기회다. IT 강국의 강점을 이용해 그쪽으로 가는 게 맞다. 한국의 성과가 축적돼 나오고 있는 부품소재 산업도 유망하다.
중국은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파괴적 혁신을 하고 있다. 우리가 약한 부분이다. 핵심은 IT를 활용하는 거다. 과거 디지털 패러다임이 아날로그 패러다임을 대체했는데 지금은 스마트 패러다임으로 옮겨가고 있다. 여기에 한국이 올라타야 한다. 좀 더 창조적인 마인드가 필요하다. 정부가 불필요한 규제는 과감하게 개혁해야 한다.
-올해 한국 경제는 어떻게 가야 할까.
△임기응변식 대응이 아니라 장기적 처방이 필요하다. 정부가 너무 많은 것을 잡고 있는데 놓아야 한다. 연구개발(R&D)도 정부가 주제를 잡고 할 사람 손 들라고 하는 식인데 미국의 경우 혁신 나오는 것을 보면 돈을 주고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해서 나온다. '자원(resource)'을 분산해야 창의적 시도가 나올 수 있다.
/대담=이연선 경제부차장 bluedash@sed.co.kr
/정리=김상훈기자 ksh25th@sed.co.kr 사진=권욱기자
◇약력 △1960년 서울 △1983년 서울대 경제학과 △1989년 미국 UC버클리 경제학 박사 △1989~1992년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 책임연구원 △1992년 영국 애버딘대 조교수 △1997년 세계 3대 인명사전 '마키스 후스 후' 등재 △2004~2005년 세계은행 컨설턴트 △2006~2008년 서울대 중국연구소 소장 △2010년 현대중국학회 회장 △2011년 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1992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2004년~ ㈔경제추격연구소 소장 △2012년~ 유엔 개발도상국 개발계획 수립 상설 자문기구(UN-CDP) 자문위원 △2013년~ 서울대 경제연구소 소장 △2015년~ 제3기 동반성장위원회 위원 △2016년~ 슘페터학회 회장 |
글로벌 경기둔화에도 한국 상대적으로 잘 버텼지만 김상훈 기자 ksh25th@sed.co.kr |
中 내수 이제 돌아가기 시작… 경착륙 걱정은 기우 김상훈 기자 ksh25th@sed.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