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우리나라는 원자력발전소가 밀집해 있고, 터널을 뚫어 실험을 할 산이 많은 등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경쟁국인 프랑스와 중국보다 유리한 상황이다.
물리학자들은 우리가 중성미자의 질량, 또는 강도를 발견하면 만물의 근원을 설명하는 대통일 이론에 중요한 진전을 이루는 것은 물론 거대과학 분야에도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중성미자는 측정이 극도로 어렵지만 최근 질량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지난 2004년. 100여명의 세계 입자물리학 전문가들은 어떤 문제를 둘러싸고 2년간 면밀히 검토한 결과를 백서로 펴냈다.
수 십 년 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풀기 위해 어떻게 실험을 디자인해야 할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결과였다. 그 것은 바로 중성미자의 질량변환 상수 중 밝혀지지 않은 마지막 상수 측정 문제였다.
이 백서의 결론을 접한 한국의 물리학자들은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한국이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입자물리학 거대 실험일지 모른다, 아니 한국을 위해 지난 수 십 년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리학자들은 바삐 움직였다. 세계 학계에 “한국이 중성미자 질량변환 상수 규명 실험에 돌입한다”고 선언했고 급박하게 정부에 연구비 지원을 요청했다. 외국 학자들 표정에서는 “한국이 그런 실험을 주도해본 적도, 정부가 지원하는 시스템도 없지 않느냐"며 못 미더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사실입니다. 경험도 없고, 시스템도 없죠. 그런데 한국의 장점이 뭔지 아십니까? 시스템이 없는 대신 빠르게 해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대응한 것은 바로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김수봉 교수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50여명으로 구성된 원전 중성미자 진동변환 실험(RENO)을 이끌고 있다. 과학기술부로부터 연구비 90억원을 지원받아 지난해 착수, 전남 영광 원전 인근에 장비를 건설 중이며, 2012년 결과를 내놓을 예정이다.
40년을 기다린 한국의 도전
중성미자는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 중 하나다. 핵융합 반응을 하는 태양에서도 나오고, 핵분열 되는 원전에서도 나온다. 특히 지구 대기에서도 생긴다.
이토록 풍부하게 널려 있지만 질량도 작고 전하도 없이 중성이어서 다른 입자들을 그냥 통과해나가기 때문에 측정이 극도로 어렵다. 하지만 최근 여러 실험을 통해 질량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중성미자는 전자중성미자, 뮤온중성미자, 타우중성미자의 3가지가 있는데 이 3종류끼리 서로 변환한다는 사실이 바로 질량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물리학자들은 중성미자가 서로 바뀐다는 사실과 함께 그 강도(진동변환상수)도 잴 수 있었는데, 3가지 진동변환 상수 중 1가지만은 유독 값이 작아 1970년대부터 시도된 실험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1970년대 연구자들은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중성미자를 검출함으로써 이 상수를 알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원전 바로 옆에 작은 검출기를 두어서는 턱도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다른 실험을 통해 알게 됐다.
1990년대 연구자들은 다시 1㎞쯤 떨어진 곳에 대형 검출기를 놓고 실험을 반복했다. 이때만 해도 기대는 컸다. 하지만 이 상수 값은 여전히 검출기의 오차범위 안에 들 정도로 작았다.
2004년 펴낸 백서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을 담고 있다. 원전으로부터 나오는 중성미자의 수는 엄지손톱(1㎠) 크기 면적에 초당 10조개가 스쳐 지나갈 정도로 많지만 검출기가 잡아낼 수 있는 수는 하루에 몇 개 정도뿐이었다.
얼마나 변환했는지 하는 상수는 그래서 검출기의 오차범위 안에 있었다. 물론 도시만한 터널을 파고 빌딩만한 검출기를 짓는다면야 정밀측정이 가능하지만 현실적인 방법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결론은 원전 바로 옆에 근거리 검출기를 설치하는 것과 동시에 1.5㎞쯤 떨어져서 원거리 검출기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과거의 실험에서는 원래 원전에서 나온 중성미자 개수가 몇 개인지를 계산할 때와, 검출장비가 중성미자를 잡아내는 과정 자체에서 오차가 존재했지만 근거리-원거리 검출기를 비교하면 두 오차가 자연스레 상쇄되기 때문이다.
한국, 프랑스, 중국의 치열한 경쟁
“우리나라는 자원이 부족하죠. 그래서 원전을 많이 지었구요. 그리고 땅이 좁아 원전도 몇 군데에만 밀집해 있습니다. 그게 이 실험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아세요?”(김수봉 교수)
그렇다. 총 6기의 원자로가 밀집된 영광 원자력발전소는 출력 규모가 열 생산 기준 17.3GW로 세계 최대다. 원래는 일본 카시와자키 원전이 세계 최대 규모였는데, 최근 지진으로 현재는 가동 중단상태다.
출력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핵분열 반응이 많고, 중성미자 역시 많이 배출돼 실험결과를 보기 쉽다는 의미다.
또 다른 천혜의 조건은 한국에 산이 많아 손쉽게 터널을 뚫을 수 있다는 점이다. 중성미자 검출은 워낙 예민한 실험이라 우주나 대기 중에서 날아오는 방사선 등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두터운 암반 속에 굴을 뚫어 측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부분 중성미자 검출기가 폐광 속에 자리 잡는 이유다.
산이 없으면 지하로 수직갱도를 파 내려가야 하고, 이 경우 시간과 비용은 물론 공사방법이 훨씬 까다로워진다.
아니나 다를까 영광 원전 주변에는 양쪽에 나란히 산이 있어 한쪽은 원전으로부터 150m, 다른 한쪽은 1.2㎞ 떨어진 곳에 터널을 뚫고 검출기를 놓는다.
산 많고 땅 좁고 자원은 없는(그래서 원전이 밀집된) 환경이 물리학 실험의 천혜의 조건이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는 경쟁하고 있는 외국의 실험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중성미자 진동변환상수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 아니다.
프랑스의 double-CHOOZ 실험팀과 중국 Daya Bay 실험팀이 우리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실험에 착수해 하루라도 빨리 결과를 내기 위해 숨이 차도록 뛰고 있다.
프랑스 연구팀은 1990년대 1개 검출기 실험을 수행했던 팀으로 여러모로 우리보다 이점이 있다. 하지만 원전의 출력 규모를 따지면 프랑스(8.7GW)나 중국(11.6GW)은 영광 원전보다 한 수 아래다.
또한 프랑스의 1개 검출기는 산 속 터널에 자리 잡지만 다른 1개는 산이 없어 땅을 파고 있다. 중국의 경우 원전이 영광처럼 밀집해 있지 않아 총 8개의 검출기를 띄엄띄엄 짓고 있다.
진동변환상수, 어디쯤에?
원전 중성미자 진동변환 실험팀은 영광 원전 양옆 산에 길이 100m와 300m의 터널을 각각 뚫고 높이 8m, 총 무게 300톤(실제 검출이 이뤄지는 표적 규모는 15톤)의 검출기를 2개 지을 예정이다.
현재 터널 암반조사를 마치고 11월 굴착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 동안 지하시설 구축을 책임진 전남대 김재률 교수는 지역 주민, 행정관청의 이해를 구하느라 전남의 인맥을 총동원했고, 서울대 최선호 교수와 성균관대 최영일 교수팀이 책임진 검출기 설계와 시제품 제작은 이미 마무리됐다.
경북대 김동희 교수는 검출기의 핵심 요소인 액체 섬광물질을 검토한 끝에 이수화학이 만드는 합성세제 원재료 물질을 친환경적이고 저렴한 후보로 꼽고 있다.
광센서 등 주요 부품을 일본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드물게 국내 조달이 가능한 부분이다.
우리나라의 검출기 민감도는 프랑스 팀보다는 높고, 8개 검출기를 지을 중국 팀보다는 낮다.
진동변환상수가 실제 어떤 민감도로 측정될 만한 수준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 팀 모두 이론적 예측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운 좋게 우리가 진동변환상수를 측정해 내면 만물의 근원을 설명하는 대통일 이론에는 또 한번의 중요한 진전이 이뤄진다.
원전 중성미자 진동변환 실험은 우리나라도 독자적으로 거대 물리학 실험을 시작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크다.
원전 중성미자 진동변환 실험은 우리나라도 거대 물리학 실험을 시작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또한 좀 더 미래를 위한 대규모 기초연구의 발판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페르미연구소나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일본 양성자가속기연구단지(J-PARC)처럼 수 조원 규모의 연구비를 털어 넣어 수㎞ 반경의 입자가속기를 짓고, 수백 ~ 수천 명의 공동연구자가 실험을 진행하는(그래서 의사소통을 위해 월드 와이드 웹을 만들어야 했던), 그런 거대과학에 우리도 살짝 발을 들이민 것이다.
먹고 살기 바빴고, 돈 되는 연구만 집중하던 우리가 신약이나 전투기가 나오지도 않는 기초 연구에 90억원을 쏟아 붓는다는 것은 과거와 질적으로 달라진 연구개발 수준을 실감케 한다.
거대과학을 향하여
원전 중성미자 진동변환 실험은 좀 더 미래를 향한, 대규모 기초연구의 발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2020년대를 염두에 둔 대형 공동실험에 대한 논의를 이미 시작했다. 한일 양국이 피처와 캐처가 되어서 1,000㎞를 가로질러 중성미자 빔을 쏘고 받는 T2KK(도카이에서 카미오카를 거쳐 코리아까지라는 의미) 실험이 그것이다.
실험의 골자는 이렇다. 도카이에 강력한 양성자가속기를 짓는 일본이 우리나라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중성미자 빔을 쏘아 보내면 한국은 이를 무려 1,000㎞ 밖에서 대규모 검출기로 받아 측정하는 것이다.
검출기는 커야 한다. 100만톤 규모다. 원전 중성미자 진동변환 실험 검출기(표적만 15톤)와는 비교가 안 된다. 비용도 5,000억원 쯤으로 예상된다.
이것이 현실화하면 3가지 중성미자의 질량 순서와 CP대칭성붕괴를 발견하는 정밀실험이 가능하다. 중성미자의 질량 자체를 측정하는 실험은 여전히 불가능하지만 대신 어떤 중성미자가 가장 무거운지 그 순서만은 알 수 있다.
또 CP대칭성붕괴란 우리 우주에서 물질과 반물질이 똑같이 상쇄되지 않아 물질의 우주만 남게 된 현상인데, 중성미자와 반중성미자를 비교하는 실험은 엄두조차 낸 적이 없었다.
일본은 2008년 도카이 양성자가속기가 완공되면 일본 내에서 300㎞쯤 떨어진 카미오카로 빔을 쏘아 실험을 할 계획이지만 CP대칭성붕괴를 확인하기엔 이 거리가 너무 짧아 한국에 검출기를 짓는 대안이 2년 전부터 급부상했다.
좁은 땅과 제한된 자원이 우리를 이끌고 있다. 1,000㎞쯤 되는 통 큰 실험으로.
김희원 한국일보 기자 hee@hk.co.kr
중성미자 연구 어떤 의의 있나
중성미자는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 중 하나로 관측이 잘 안 돼 유령입자로 불린다.
기본 입자는 크게 무거운 입자와 가벼운 입자로 나뉜다. 원자 핵(양성자, 중성자)을 만드는 쿼크(업, 다운, 톱, 보텀, 참, 스트레인지의 6종류가 있다)는 무거운 입자고 전자, 뮤온, 타우, 전자중성미자, 뮤온중성미자, 타우중성미자는 가벼운 입자에 속한다.
1930년 천재적인 이론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가 처음 존재를 예견했지만 26년이 지나서야 실제 관측됐다. 중성미자가 다른 입자들과 거의 상호작용을 하지 않아 어떤 장치도(사람이나 지구마저) 그냥 통과하는 탓이다.
중성미자는 수 십 년 동안 실험 물리학자들을 골탕 먹였고, 표준모형이 틀렸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 센세이셔널한 입자이기도 하다.
1960년대 화학자 레이몬드 데이비스가 태양에서 오는 중성미자 검출장치를 고안, 20년이나 지켜봤지만 이론적 예측량의 30%밖에 검출이 안 돼 ‘태양중성미자의 수수께끼’를 남겼다.
다른 연구팀도 측정에 착수했지만 마찬가지 결과를 나타내서 장치의 문제냐, 이론적 오류냐를 놓고 거친 공박이 오갔다.
나중에야 중성미자는 3가지 종류가 있고, 태양으로부터 지구까지 오는 사이 다른 종류로 바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때문에 3종류 중 한 가지만 검출이 가능한 검출기로는 늘 이론적으로 계산된 양보다 적은 수가 검출됐던 것이다.
중성미자의 진동변환을 명백히 입증한 것은 1998년 일본이 슈퍼카미오칸데라는
검출기를 이용해 수행한 실험으로 지금까지 중성미자와 관련된 3번의 노벨상 외에 또 하나의 노벨상을 예약해 놓은 상태다.
그런데 중성미자가 진동변환 한다는 사실은 물리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와 입자들 사이의 힘을 하나의 통일된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물리학의 꿈이랄 수 있다.
이러한 꿈을 향해 나가는 과정의 성과물이 표준모형, 대통일 이론 등이다.
그런데 표준모형은 중성미자의 질량이 0이라는 것을 전제로 수립된 이론이었고, 중성미자가 서로 변환하는 것은 질량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표준모형이 틀렸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낸 실험이 된 것이다.
중성미자 연구는 그래서 대통일 이론을 검증하는 실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대통일 이론은 우주의 탄생과 입자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장점을 갖고 강력한 이론으로 자리 잡았지만 실험적으로 검증할 길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중성미자들 사이의 변환상수가 모두 밝혀지고 나면 중성미자의 변환과 쿼크의 변환이 왜 그렇게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가 하는 대통일 이론의 숙제를 해결함으로써 이론적 완성을 이끌어 낼 수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