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이 도입된 지 20년. 우리나라의 퇴직연금 지형은 느리지만 확실히 바뀌었다. 2012년 전체 적립금에서 확정급여(DB)형 비중은 73.9%였으나 최근 통계에서는 과반이 무너졌다. 단순한 점유율 변화가 아니다. 임금체계와 경제 환경이 바뀌면서 퇴직연금 제도의 중심축도 DB에서 확정기여형(DC)으로 이동하고 있다. 최종임금과 근로기간에 연동된 퇴직금과 DB형 퇴직급여는 더 이상 노후의 안전판이 되지 못한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DB형의 매력이 예전 같지 않은 첫 번째 이유는 임금곡선의 평탄화다. 연공서열식 호봉제 대신 연봉제를 도입하는 사업장이 늘면서 근속 연차만으로 임금이 자동 상승하는 구조가 약해졌다. 또 임금피크제를 운영하는 사업장도 많아졌다. 300인 이상 사업체의 임금피크제 도입률은 2013년 21.5%에서 2022년에는 절반을 넘겼다. 그 결과 근속연수별 임금 격차는 2016년 2.3배에서 지난해 1.9배로 줄었다. ‘최종임금’과 ‘근속 프리미엄’이 약해지면, 이 두 축에 의존하는 DB형 급여 산식의 기대효용이 떨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저성장에 따른 실질임금 둔화다. 2000년대 2%대였던 실질임금 상승률은 최근 5년 동안 0%대에 머무는 구간이 잦아졌다. 일본의 –0.6%대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 경기 반등 국면이 있어도 장기 추세는 완만하게 하락하고 있다. 임금과 성장의 탄력이 낮아질수록, 퇴직 전 최종임금을 전제로 한 DB형의 체감 효용 감소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반면 DC형의 대체 매커니즘은 운용을 통해 작동한다. DC형 퇴직연금에 대한 운용 규제가 완화되고 디폴트옵션 상품, 적격 타깃데이트펀드(TDF), 로보어드바이저 등 금융 혁신이 이뤄지면서 가입자의 투자 선택권은 더욱 넓어졌다. 상장지수펀드(ETF)와 TDF의 보편화로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웠던 자산 리밸런싱과 리스크 관리가 자동화돼 가입자의 편익이 늘었다. 최근 5년 구간에서 실적배당형 상품이 원리금보장형보다 1%포인트 이상 높은 운용수익률을 냈다는 점도 실적배당형의 경쟁력을 보여준다. 이처럼 DC형 연금계좌를 통해 내 노후자산을 글로벌 성장에 연동해 두면 인플레이션을 방어하면서 필요한 노후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개인이 퇴직급여를 직접 관리해야 하는 시대에 필요한 건 관점의 전환이다. 저성장·임금 평탄화 시대에는 ‘최종임금이 얼마나 오를까’보다 ‘장기 운용을 어떻게 설계할까’가 중요해졌다. DC형은 내 노후자산을 적립·분산·조정해 주는 도구로 활용해야 하며,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적립금을 글로벌 분산투자를 지향하는 실적배당형 상품에 배치해 장기 운용수익률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직접 운용이 부담스럽다면 디폴트옵션 제도로 제공하는 생애주기형 투자상품을 기본값으로 설정하는 것도 합리적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ymjeong@sedail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