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퇴직연금 제도는 “사람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시스템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가입자가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아도 저축과 투자가 자동으로 이뤄지는 구조를 설계해 세계 최대 노후 자산 시장을 만들어냈다.
17일 뱅가드에 따르면 미국의 자동 가입 제도 도입 사업장 비중은 지난해 말 60%를 넘어섰다. 미국 근로자는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별도 신청 없이 퇴직연금에 자동 가입되고 급여의 일정 비율이 매달 납입된다. 근로자가 이를 거부하지 않으면 납입 비율은 매년 자동으로 상승하며 적립금은 사전 지정된 기본 투자 옵션에 자동 투자된다.
특히 미국의 경우 기업 입장에서도 별도 관리 부담이 적어 도입이 빠르게 확산됐다. 고용주가 약 8.3%를 의무적으로 기여해야 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근로자와의 합의를 통해 기여율을 결정할 수 있어 도입 유인이 컸다.
미국 노동부(DOL)나 뱅가드 등 주요 기관 조사에 따르면 자동 가입 플랜의 참여율은 대체로 90% 안팎으로 자동 가입이 없는 사업장보다 평균 30%포인트 이상 높았다. 자동 증액(auto-escalation) 기능을 운영하는 플랜 역시 기본 납입 비율이 6% 수준에서 10%대까지 자연스럽게 높아지는 경향이 여러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됐다. 이는 특정 연도의 단일 통계가 아니라 미국의 대형 운용사, 정부, 학계 조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흐름이라는 점에서 정책 효과가 더욱 뚜렷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생각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저축되는 구조 덕분에 수백만 명의 근로자가 은퇴 준비를 시작했으며 계좌 잔액도 빠르게 늘었다. 올 6월 말 기준 확정기여형(DC)과 한국의 개인형(IRP) 퇴직연금 제도와 유사한 개인퇴직계좌(IRA)에 적립된 자산은 총 31조 달러(약 4경 5524조 원)에 달한다. 단일 금융 상품군 규모가 한 국가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뛰어넘을 만큼 미국 퇴직연금 시장이 비대해졌다는 의미다.
미국 퇴직연금 제도의 대전환점은 2006년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시행한 연금보호법(PPA)이었다. 정부는 중산층의 노후 불안, 낮은 연금 가입률, 저금리 중심의 비효율적 투자 관행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재무학을 정책 설계에 도입했다. 리처드 세일러 시카고대 교수와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 교수가 제시한 ‘넛지(부드러운 개입을 통한 합리적 선택 유도)’ 이론이 제도의 뿌리였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정부는 투자자들이 ‘미래보다 현재를 중시하고 투자를 미루며 손실을 두려워한다’는 인간의 비합리성에 주목했는데 이를 교정하려 하기보다 이 같은 행동 특성을 제도 설계에 활용했다”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축과 투자가 자동으로 이뤄지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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