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고액 자산가의 자산을 굴리기 위해 만든 전속 운용사인 패밀리오피스(FO) 자금 중 최소 8000억 원이 2023년 이후 싱가포르에 넘어간 것으로 파악됐다. 창업가가 기업 매각 등을 통해 확보한 자금을 상속·증여세나 주식양도소득세 부담 없이 전 세계의 다양한 자산에 투자하기 위해 싱가포르로 투자 이민을 떠난 것이다.
13일 싱가포르의 패밀리오피스 업계에 따르면 2020~2023년 풍부한 유동성을 토대로 높은 가치로 기업을 매각한 한국인 창업가 중 일부가 2023년 이후 싱가포르에 패밀리오피스를 설립했다. 2021년 2조 원에 하이퍼커넥트를 미국 매치그룹에 매각한 정강식 전 공동창업자는 싱가포르에 패밀리오피스를 세우고 스타트업을 위한 엔젤투자자로 활동하고 있다. 형제간 분쟁이 벌어졌던 효성그룹 오너 일가 일부도 싱가포르에 패밀리오피스를 마련했으며 2023년 2조 7000억 원에 일진머티리얼즈를 롯데그룹에 매각한 허재명 전 사장 역시 싱가포르에 설립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관계자는 “한국인 자산가들이 싱가포르 패밀리오피스 설립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이 여러 조세회피처 가운데 싱가포르에 주목한 것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패밀리오피스 산업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고액 자산가의 자산운용을 감시하거나 상속에 대해 과세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이 싱가포르에 투자하거나 기부하도록 유도하고 고급 일자리가 보장되는 금융 산업을 키우라는 게 싱가포르 정부의 방침이다. 전 세계 부호들이 몰리면서 싱가포르 금융 산업 발전은 물론 증시 활성화와 스타트업 투자로 이어지자 각국이 패밀리오피스 유치 경쟁에 돌입했다.
반대로 한국은 고액 자산가에 대한 상속·증여세 완화 요구에도 정부의 방침이 완고하다. 대만 출신으로 글로벌 투자은행(IB)을 거쳐 싱가포르 패밀리오피스 키리캐피털에서 일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대만도 제조업을 중시하면서 고액 자산가들이 싱가포르 등 해외로 빠져나갔다”면서 “한국도 패밀리오피스 산업을 지원하지 않으면 대만처럼 자본이 이탈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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