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보이스피싱 근절대책 중 하나로 내놓은 ‘금융사에 대한 무과실 배상 책임 법제화’가 현행법에 위배될 수 있다는 법무법인 검토 결과가 나왔다. 일방 당사자의 고의 또는 과실이 있어야만 손해배상책임이 성립하는 과실책임주의와 충돌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검토를 의뢰한 은행연합회는 이 같은 결론을 토대로 회원사들과 대응책을 마련할 방침이다.
2일 이헌승 국민의힘 의원이 은행연합회로부터 받은 적법성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법무법인 화우는 “사법 관계에서는 일방 당사자의 고의 또는 과실이 있어야만 손해배상책임이 성립함이 원칙”이라며 “금융회사의 과실 여부와 무관한 배상 책임을 금융회사에 부여하는 것은 민사법상 과실책임주의에 비춰 신중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금융 당국은 올 8월 보이스피싱 피해가 발생하면 범행에 쓰인 계좌를 관리한 금융사의 직접적 과실이 없더라도 피해액을 물어주도록 법제화하는 내용의 보이스피싱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에 은행연합회는 법률자문사를 통해 기존 법률과의 충돌 여지가 없는지 검토를 의뢰한 바 있다.
화우는 입증책임 전환의 문제를 지적했다. 정부안은 보이스피싱 피해 발생 시 금융소비자에게 고의 또는 중과실이 있는 경우에는 금융사의 배상책임을 면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제는 금융사가 입증책임을 부담해야 한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과실책임주의하에서는 배상 책임을 주장하는 측은 상대방의 과실을, 배상 책임을 부정하는 측은 본인의 무과실을 각각 입증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짚었다. 특히 범죄자와 피해자 사이 통화 내용과 개연성 등은 오직 소비자 본인만이 정확히 알 수 있는 사적 정보라는 점에서 정보의 비대칭이 발생할 수 있다는 논리다.
정부안이 통과될 경우 오히려 보이스피싱 범죄가 만연해질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금융사가 배상을 보장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가 발생해 소비자 입장에서 보이스피싱 예방을 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줄어들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보고서에 따르면 무과실 책임 배상 법제화의 근거로 제시된 영국에서도 피해자가 △주의의무 △신고의무 △정보제공 의무 등을 이행한 경우에 한해 최대 8만 5000파운드(약 1억 6000만 원) 한도에서 배상을 하도록 하고 있다. 화우는 “해외 주요 사례에 비춰보면 영국도 소비자의 과실 여부를 고려해 제한적으로 배상이 이뤄지고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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