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의 초대 대통령실 정책실장인 김용범 실장은 그동안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강하게 주장해온 인물이다. 과거 그가 몸담았던 가상화폐 싱크탱크 해시드오픈리서치는 올 상반기 스테이블코인을 주제로 한 보고서를 잇달아 내놓으며 금융계에 작지 않은 파장을 낳았다. 해시드오픈리서치는 보고서를 통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확산으로 통화 주권의 약화가 우려된다’거나 ‘스테이블코인은 더 이상 실험이 아닌 통화 권력의 재편’ ‘원화 스테이블코인으로 디지털 주요 2개국(G2)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수위 높은 발언을 내놓았다. 이 같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주창론은 김 실장이 대통령실에 입성하기 직전까지도 꾸준하게 이어졌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지난 대선 공약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 활성화’를 내세웠다. 이후 가상화폐 업계와 핀테크 기업은 물론 주요 금융사들까지 본격적으로 스테이블코인 사업에 뛰어들면서 스테이블코인은 단숨에 금융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스테이블코인 열풍은 급기야 한국은행의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 사업에도 찬물을 끼얹으며 올 4분기 예정됐던 2차 실험이 잠정 중단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최근 들어 스테이블코인 도입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지만 정작 이를 뒷받침할 제도화 작업은 여전히 더디기만 하다. 국회에는 이미 관련 법안 4건이나 발의돼 있고 금융 당국도 다음 달 정부안을 내놓겠다고 하지만 연내 통과는 쉽지 않아 보인다. 최근 발표된 금융 당국 조직 개편과 국정감사, 예산 정국까지 줄줄이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운이 좋아 연내에 법이 통과되더라도 시행령 마련을 포함한 후속 절차를 감안하면 일러야 2027년에야 제도가 시행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결국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내년이나 내후년에 스테이블코인 법제화가 이뤄지더라도 ‘디지털 G2’는 꿈도 꾸지 못한 채 통화 주권을 빼앗길 걱정부터 해야 할 노릇이다. 차라리 입법이 늦어진다면 규제 샌드박스와 같은 제도를 통해 먼저 실험에 나서고 초기 부작용을 점검해보는 것도 대안이다. 주요 선진국들이 이미 관련 제도를 마련하고 사업 준비에 들어간 지금, 한국은 디지털 G2가 아니라 디지털 후진국을 걱정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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