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르네상스 발현의 배경에는 메디치 효과(Medici effect)가 있었다. 피렌체를 이끌던 메디치 가문은 예술·과학·철학 등 다양한 인재들의 소통과 교류를 촉진하며 이들을 적극 후원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과 경험이 만나 예기치 못한 아이디어와 혁신이 쏟아졌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철학자이자 물리·천문학자로서 지동설을 입증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술과 해부학을 넘나들며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같은 걸작을 남겼다. 경영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메디치 효과’라고 부른다. 혁신은 경계가 허물어지고 이질적 자원이 융합될 때 나타난다.
오늘날 글로벌 제조업이 직면한 상황은 르네상스 이전 중세의 암흑기를 떠올리게 한다. 보호무역주의와 지정학적 갈등, 공급망 불안이 겹치며 제조업 패러다임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배터리 같은 전략산업은 경제안보의 핵심으로 부상했고, 기술 패권 경쟁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우리는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반도체지원법(칩스법) 등의 규칙에 맞춰 대응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고, 최근의 관세 협상에서 이는 더욱 명확했다. 규칙을 설계하는 ‘룰메이커’가 아닌, 대응하는 ‘팔로어’에 머물렀다.
지난달 25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확인된 한미 제조 파트너십은 이런 구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첫 단추다. 한국이 미국의 미래 산업 패러다임을 함께 설계하는 전략적 동반자로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회담을 계기로 조선·원자력·항공·공급망 등 핵심 분야에서 11건의 양해각서(MOU)가 체결되며 ‘한미 제조업 르네상스 파트너십’이 본격 시동을 걸었다. 이제 한국은 미국이 만든 경기장에 뛰어드는 선수가 아닌 경기장을 함께 설계하는 대전환점에 선 것이다.
이런 변화를 주도하고 상징적으로 담아낸 제안이 ‘마스가(MASGA) 프로젝트’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 최강의 조선 생산능력을 자랑했지만 현재 시장점유율은 0.1%에 불과하다. 반면 한국은 LNG운반선·쇄빙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분야에서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과 인재를 보유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불안과 주요국의 해군력 강화로 조선·방산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한국과의 협력은 미국에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마스가 프로젝트는 경제안보의 핵심 동맹으로서 전략적 선택일 뿐 아니라 양국 조선업 생태계의 파이를 키울 수 있는 최적의 기회다.
반도체·배터리·인공지능(AI) 같은 첨단산업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기술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투자를 단행하고 있으며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역량과 인프라·AI 혁신을 위한 데이터를 갖고 있다. 한미 제조 파트너십은 이러한 기술·자본을 결합해 새로운 산업 지형을 설계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텍사스 테일러시에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과 함께 한국 중소·중견 협력사를 위한 ‘한국형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미국의 필리조선소는 이미 기존의 인프라 위에 한국 기술, 공급망을 결합해 첫 번째 선박 ‘스테이트 오브 메인’호를 완성했다. 두산에너빌리티도 텍사스주가 추진 중인 ‘AI 캠퍼스 프로젝트’에 원전 기자재 공급 협력을 추진 중이다. 이처럼 다양한 협력 모델의 탄생은 향후 수십 년간 글로벌 시장과 산업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며 우리 경쟁력을 높여줄 것으로 확신한다.
한미 제조 파트너십은 양국 기술과 자본·인재가 융합하는 새로운 생태계를 공동으로 설계하는 일이며, 이제 그 설계도의 첫 장을 넘기고 있다. 이번 파트너십을 계기로 한미 양국이 세계를 놀라게 할 혁신을 시작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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