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난에 나프타분해시설(NCC) 생산 설비를 25% 줄이기로 한 석유화학 업계가 중국과 일본 등 외국은행에서 빌린 돈이 4조 원을 웃도는 것으로 확인됐다. 외국은행은 금융 감독 당국의 관리에서 한발 비켜나 있는 데다 현재 채권단 논의에서도 빠져 있어 최악의 경우 석화 기업의 자금 부담이 수조 원가량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27일 금융계에 따르면 중국은행·중국건설은행·미즈호은행 등 외국은행 18곳의 국내 10대 석화 기업에 대한 대출채권 잔액이 23일 기준 4조 657억 원으로 집계됐다.
이 중 70%(2조 8556억 원)는 1년 내 만기가 돌아온다. 상환일까지 3개월 남은 대출만 1조 1824억 원이다. 나라별로는 중국계 은행 대출 잔액이 1조 6086억 원, 일본계가 9357억 원에 달한다.
문제는 외국은행들이 국내 석화 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에 동참할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금융 당국은 다음 달 중 은행권 공동 자율협약을 체결하고 대출 상환 유예와 만기 연장을 해줄 계획이다. 하지만 국내 주요 은행들과 달리 외국은행들의 협약 참석 여부는 아직까지 미확정 상태다. 협약에 참여하는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외국은행들은 아직 협약에 들어오지 않았다”며 “만기가 돌아오는 외국은행 대출에 대해서는 석유화학 업체가 자체적으로 막아야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21일 주재한 ‘석유화학 사업재편 금융권 간담회’에 외국은행 관계자는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KB·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과 한국산업은행을 비롯한 정책금융기관의 고위급 인사가 총출동한 것과 대조된다. 금융 당국이 은행권에 석유화학 기업에 대한 대출 만기 연장을 주문하기 위해 소집한 자리였지만 조 원 단위 채권을 쥐고 있는 외국은행들이 빠진 것을 두고 시장에서는 당국의 구상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실제로 외국은행 18곳의 주요 석유화학 기업 10곳에 대한 대출채권 규모는 23일 기준 4조 657억 원에 달한다. 기업별로 보면 지난해 유동성 위기를 겪은 롯데케미칼의 대출채권 규모가 9548억 원으로 가장 크다. 추가로 △SK지오센트릭 5949억 원 △한화토탈 5508억 원 △HD현대케미칼 4760억 원 △GS칼텍스 4164억 원이 뒤를 이었다. 10대 기업 중 외국은행에 손을 벌리지 않은 곳은 대한유화 한 곳뿐이다.
문제는 외국은행들을 자율협약 테이블로 끌고 오더라도 당국의 구조조정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조할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자율협약은 채권자의 75%(채권액 기준) 이상의 동의를 거쳐 대출 만기 연장이나 상환 유예 등 금융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로 짜여 있다. 시장에서는 금융 당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국내 은행들과 달리 외국은행들이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지원 결정을 유보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새어 나온다. 대규모 채권을 쥔 외국은행들이 까다롭게 나오면 금융 지원 시기도 늦어지게 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외국은행들이 자율협약에 들어오지 않아도 문제지만 참여해도 자칫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외국은행 중에서도 중국계 은행이 쥐고 있는 채권 규모가 압도적으로 큰 점도 우려를 더하는 대목이다. 중국은행·건설은행·공상은행·광대은행·교통은행·농업은행의 석유화학 기업에 대한 대출 잔액은 1조 6086억 원에 달한다. 이번 석유화학 구조조정은 중국발 저가 공세를 넘기 위한 것인데 중국이 경쟁 관계에 있는 한국 기업에 대한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미즈호은행·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MUFG)·미쓰이스미토모 등 일본 3대 메가뱅크가 보유한 대출채권도 9357억 원으로 중국 다음으로 많은 채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은행들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 석유화학 업계의 재무 부담은 불어날 수밖에 없다. 석유화학 업계의 전체 차입금은 총 32조 원으로 정부는 이 중 회사채와 기업어음(CP), 외화증권 등 16조 원 규모의 시장성 차입은 자체 상환할 것을 주문한 바 있다. 외국은행들이 모두 발을 빼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면 석유화학 업계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차입금은 2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권에서는 중국과 일본 등 해외 금융 당국과 협조를 통해 불확실성을 덜어야 한다는 얘기가 많다. 채권단 협약에 참여하는 한 은행 관계자는 “중국계 은행들은 중국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미쳐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단하기 어려운 만큼 선제적으로 대화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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