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가 65억 달러(약 8조 9700억 원) 규모의 무기 2차 수출 계약과 관련해 한국이 제시한 금융 지원 조건을 거절했다. 한국이 무역보험 명목으로 책정한 보험료율이 과도하게 높다는 게 이유다. 시장에서는 수출 계약 최종 발효 시점과 무기 납품 일정이 줄줄이 뒤로 밀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8일 금융계에 따르면 폴란드개발은행(BGK)은 K2 전차 수출금융 업무협약(MOU)상에 적시된 무역보험 보험료율을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을 최근 한국무역보험공사 측에 전달했다.
이달 초 무보와 한국수출입은행은 BGK와 2차 무기 수출 계약을 뒷받침하기 위한 MOU를 체결했다. 협정은 무보와 수은이 각각 39억 달러와 13억 달러 규모의 보험·보증을 제공해 전체 수출 계약금(65억 달러)의 80%를 보장해주는 것이 뼈대다.
무보는 보험 상품 만기를 16~20년으로 나누고 5% 안팎의 보험료율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BGK는 영국을 비롯해 다른 국가와 체결했던 방산 수출 금융 계약 조건을 내세우며 보험료율이 과도하게 높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보험료율을 낮추지 않으면 계약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금융 계약 조건이 합의되지 않으면 수출 계약 발효 일정이 예상보다 늦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폴란드가 2차 방산 수출 계약 과정 내내 금융 지원 내용을 두고 한국 측과 실랑이를 벌여왔다. 실제로 폴란드 측은 한국에 수출 계약액의 80%, 50억 달러 이상의 금융 지원을 계약 체결을 위한 일종의 마지노선으로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폴란드의 완강한 요구에 한국무역보험공사와 한국수출입은행은 최근 업무협약(MOU)을 맺고 2차 수출 계약액의 80%에 달하는 52억 달러 규모의 금융 지원을 하기로 했다.
지원 규모 문제를 매듭지었지만 이번에는 세부 조건을 놓고 파열음이 나고 있다. 폴란드가 MOU에 적시된 보험료율까지 거부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보험료율을 조금이라도 낮춰 자국이 부담하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다. 폴란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을 계기로 무기 수입을 대거 늘려왔는데 대금을 치를 현금은 넉넉지 않은 상황이다. 협상 과정에 밝은 한 인사는 “폴란드 측이 2차 수출계약에 대한 한국의 금융 지원을 명확히 해둬야 한다며 MOU 체결도 먼저 요청한 것으로 안다”면서 “지원 총액에 대해서는 이견을 좁혔는데 보험료율을 포함한 구체적인 지원 조건에 대해서는 양국 간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고 전했다.
양측은 대리은행 지정 문제를 놓고도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리은행은 한국 수출금융기관으로부터 보증서를 발급받아 폴란드에 수출 대금을 직접 대여하는 금융사다. 무보와 수은은 폴란드개발은행(BGK)에 대리은행을 선정해줄 것을 요청한 상태다. 하지만 BGK는 한국이 금융 지원을 먼저 확약해야 대리은행을 선정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려스러운 대목은 금융 계약에 대한 합의가 지연될수록 방산 수출 일정까지 밀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방산 계약은 크게 수출기업인 현대로템과 수입국인 폴란드 군비청을 양축으로 하는 수출 계약과 무보·수은 및 BGK 간 금융 계약으로 나뉜다. 수출 계약은 이달 1일 체결됐다. 하지만 수출 대금을 좌우하는 금융 계약이 매듭지어지지 않으면 수출 계약의 발효 시점이 늦어지게 된다.
무보와 수은은 늦어도 다음 달까지는 폴란드에 대한 금융 지원 조건을 확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시장에서는 무보가 결국 폴란드 측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새어 나온다. 이번 2차 수출 계약액은 총 65억 달러 규모로 단일 방산 수출 건으로는 최대다. 금융 계약이 지연되거나 최악의 경우 무산되면 국내 방산기업의 피해가 큰 상황이라 폴란드 측의 요구를 완전히 외면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폴란드가 2차 계약 이후 추가로 무기를 구매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이번 계약 건만으로 수지타산을 따지는 게 적절치 않다는 시각도 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이미 수출 계약까지 마친 상황에서 금융 계약을 기약 없이 미룰 수는 없을 것”이라며 “폴란드 측이 역마진을 감수하라는 정도로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무보가 한 발 물러서지 않을까 싶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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