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 생산직으로 일하는 우리 남편은 원래 매달 3800유로(약 610만 원)는 벌었는데 이제 2500유로(약 401만 원)밖에 못 받습니다. 소비와 저축을 줄여가며 버틸 수밖에 없어요.”
폭스바겐 최대 공장이 위치한 독일 볼프스부르크에서 만난 라다 알리 씨는 “이 지역에 정착한 후 이렇게 경기가 안 좋은 것은 처음”이라며 이처럼 토로했다. 남편이 실직은 면했지만 야간 근무가 사라지고 성과금이 줄면서 월 소득이 35% 가까이 감소해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게 알리 씨의 하소연이다.
유럽 최대 자동차 기업 폭스바겐의 흥망성쇠는 에너지 후진국으로 주저앉은 독일 경제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폭스바겐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사상 최초로 독일 내 공장 중 일부를 셧다운하는 방안까지 고민했으나 노조와의 합의를 통해 2030년까지 독일 내 생산을 절반으로 줄이고 전체 인력의 30%에 가까운 3만 5000명을 감축하기로 했다.
볼프스부르크시 연방고용지원센터에서 만난 조슈아 존슨 씨는 “직장을 잃은 지 반년이 넘었는데 아직 다시 일을 구하지 못해 일자리를 알아보러 왔다”며 “이렇게 오래 실직 상태인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폭스바겐에서 일했다는 또 다른 시민은 “생산직 노조원은 상당수 자리를 지켰지만 서비스직과 계약직은 무차별 해고됐다”며 “나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22명은 같은 날 한꺼번에 직장을 잃었다”고 말했다.
지역 경기는 혹한기 수준으로 얼어붙었다. 볼프스부르크는 과거 독일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도시 중 한 곳으로 꼽혔으나 이제는 문을 연 상점보다 문을 닫은 상가를 찾는 게 더 쉬울 정도가 됐다. 폭스바겐에서 27년 동안 근무한 게오르크 루소 씨는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경제위기 중에 최악”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 같은 경제 위축이 단순이 볼프스부르크에만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유럽 경제의 우등생이던 독일의 간판 제조업 기업들이 잇따라 경영난에 빠지면서다. 실제 독일 전력 도매 가격은 2020년 1월 MWh당 35유로 수준에 불과했지만 전쟁 발발 약 반 년 후인 2022년 8월에는 MWh당 699.44유로까지 치솟았다. 올해 8월 독일 전력 도매 가격은 MWh당 70유로로 5년 전보다 2배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운영 중이던 원전 전체를 폐쇄하며 탈원전 속도를 높인 탓에 값비싼 대가를 치른 셈이다.
이에 세계 최대 규모의 화학 기업인 바스프(BASF)는 독일 루트비히스하펜 공장 일부를 폐쇄하고 인력을 조정해 2026년까지 11억 유로의 비용을 절감할 계획이다. 독일 최대 철강 회사인 티센크루프스틸은 전체 인력의 40%를 정리할 방침이다. 폭스바겐 위기의 여파에 ZF프리드리히스하펜·셰플러·보쉬와 같은 부품 업체들은 잇따라 인력 감축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위기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2022년 말 2.9%까지 떨어졌던 독일 실업률은 올해 들어 3.8%까지 올랐다. 이에 따른 독일 전체 실업자 수는 300만 명에 육박해 10년 내 최대 규모까지 치솟았다.
국내총생산(GDP)도 뒷걸음질 치고 있다. 독일 경제성장률은 2023년과 2024년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한 데 이어 올해도 제로(0) 성장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미국 정부와 관세 협상에 따른 상호관세 15%도 수출·제조업 국가인 독일에는 불리한 요인이다. 실제 2025년 5월 독일 산업생산지수는 92.9로 2021년 이후 4년 전보다 뒷걸음질 쳤다.
이 같은 경제 체력 저하는 독일의 국가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독일은 2014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하는 국가 경쟁력 순위에서 6위에 올랐으나 지난해에는 24위로 10년 만에 18계단 떨어졌다. 탈원전을 추진한 후 종합적인 국가 경쟁력이 꾸준히 악화됐다는 의미다. 올해 순위는 19위로 소폭 올랐지만 경쟁력 위기는 여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염명배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에너지는 기업에 가장 중요한 생산 요소 중 하나”라며 “기업에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 구조적 변화 없이는 상황이 달라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종배 건국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우리나라도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려면 전력 수요자 관점에서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한다”며 “재생에너지 도입이 필요한 산업군, 무탄소 전원이 중요한 산업군,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시급한 산업군 등 산업별로 재분류해 전력 수요자의 선택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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