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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VB 파산이 만든 스타트업 생존 공식 '가짜 결핍을 경계하라' [정혜진의 라스트컴퍼니]

최소한의 팀으로 극한 효율 추구

'작은 거인'의 등장

2023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위치한 실리콘밸리뱅크 본사에 파산 소식을 접한 고객들이 하염없이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다. /실리콘밸리=정혜진기자




“실리콘밸리뱅크(SVB)는 상인들이 그들의 고객의 이름을 아는 소중한 동네 시장 같았습니다. 공동체가 은행을 잃는다는 것은 가족의 상실과도 같습니다” - 마이클 모리츠 세콰이어 캐피털 창업자

2023년 3월 실리콘밸리 생태계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던 실리콘밸리뱅크(SVB)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SVB는 실리콘밸리 지역 내 기업과 개인 고객으로부터 예적금을 받아 스타트업에 대출해주는 구조를 갖춘 독특한 은행이었다. 기존의 은행이 정의하는 담보를 갖추지 않아도 기업의 성장성을 믿고 돈을 내어주고 이후 기업이 성장하면 다시 거래 고객이 되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됐다. 3만여 곳의 기업을 지원하며 실리콘밸리 생태계 구석구석에 자금을 공급하는 모세혈관의 역할을 했다. 40년 간 쌓아온 역사가 무너지는 데는 36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큰 충격을 줬다. 당시 실리콘밸리 생태계의 절반 가까운 스타트업은 SVB에 자금을 예치한 상태였다. 많은 투자자와 창업자들이 은행을 찾아 자신의 잔고가 남아있기를 기도했다.

정부의 개입으로 큰 피해를 낳지 않고 해결됐지만 SVB의 파산은 많은 스타트업에게 성장과 경영 방침을 바꾸는 극적인 계기가 됐다. 비슷한 시기 생성형 AI 열풍이 실리콘밸리 일대를 휩쓸며 작고 효율적인 기업들이 등장해 SVB의 영향을 간과할 수 있지만 오늘날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작은 거인’으로의 방침 전환은 SVB 파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



SVB 파산이 만든 극한의 효율적인 팀

“SVB 파산 당시 저희 계좌의 돈 대부분이 SVB에 묶여 있었어요. 당장 몇주치 급여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정말 큰 충격이었습니다.”

AI 슬라이드 제작 서비스 감마(GAMMA)의 그랜트 리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극한으로 작은 팀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에게 어떻게 극한의 ‘비용 효율성’을 유지하게 됐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SVB 파산이었다. 당시 무사히 제품을 론칭하기까지의 시간을 피 말리는 시간으로 회고했다. 이후 회사는 위기의 한복판에서 AI를 탑재한 서비스를 내놨고 불과 2년 만에 5000만명의 글로벌 사용자를 확보하게 됐다. 회사의 매출과 이용자는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조직의 규모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감마는 중간관리자 이상의 리더를 비롯한 경영진이 모두 자신만의 전문성으로 실무를 도맡으며 동시에 사람들까지 관리하는 ‘플레이어 코치’ 체제를 확립했다. 현재도 리 창업자 겸 CEO는 별도의 재무, 회계, 인사 조직 없이 직접 이 분야를 챙기고 있다. AI 시대 발표 도구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며 초저비용 구조로 운영되는 이 회사는, 현재 실리콘밸리에서 ‘극한의 효율’을 대표하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그는 디자이너를 예로 들며 “우리 제품 디자이너는 UI·UX만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코딩을 할 수 있어서 빠르게 프로토타입 제품을 만든다”며 “고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용자 조사도 직접 나서 엔지니어나 시장 연구자의 도움 없이 이를 해내 속도가 매우 빠르다”고 설명했다. 과거에는 대여섯명이 한 팀을 이뤄서 해야 할 일을 디자이너 한 사람이 해내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여기에는 AI를 통해서 많은 AI동료들을 확보한 것도 크지만 기본적으로 극한의 효율성이라는 원칙이 밑바탕이 됐다. 실제로 리 창업자를 비롯해 팀원 중 상당수가 AI 기업 옵티마이즐리(Optimizely)에서 만나서 함께 일하고 있는데 규모는 훨씬 적고 속도감 있게 움직이는 게 특징이다. 리 창업자는 “옵티마이즐리에서 비슷한 매출을 낼 때와 비교하면 조직 규모는 10분의 1에 불과하다”며 “점점 더 많은 AI기업들이 더 오래 작은 조직을 유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퀴벌레 정신의 부활

실리콘밸리의 대표 액셀러레이터인 와이컴비네이터(YC)가 창업자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는 말이 있다.

“Roaches survive anything. Build like one.”



(바퀴벌레는 어떤 위기에도 살아남는다. 너도 그렇게 회사를 만들어라.)

YC는 위기 시기마다 '기초 체력(Default) Alive', 즉 적자가 아닌 상태로 기본 생존이 가능한 구조를 우선하라고 조언해왔다. 실제로 팬데믹과 경기침체 시기마다 확장보다 생존을 중시하고 채용보다는 유동성을 권장해왔다.

감마의 사례는 이제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실리콘밸리에는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비용을 투입해 성장하라는 오랜 원칙인 '블리츠 스케일링'의 반대편에 선 작지만 내실 있는 스타트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AI 협업툴 기업인 리니어(Linear)는 30명 이하의 개발자를 중심으로 회사가 움직이는데 회의를 최소화하고 제품의 완성도와 속도를 동시에 추구한다. 제품은 빠르게 만들고 팀은 천천히 확장한다는 게 목표다. 유료 팬덤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한 콘텐츠 기업 리드와이즈(Readwise)는 불과 5명 내외의 팀으로 운영된다. 창업자가 고객 지원과 이메일 업무까지 도맡아 수행하는 등 극도의 집중과 효율을 추구한다.

이들 기업은 공통적으로 '빠르게 확장하라'는 전통적 스타트업 공식에서 벗어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실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가짜 결핍을 경계하라

SVB의 붕괴는 단지 한 은행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창업자들에게 비용, 유동성, 위기 대응 체계 전반을 점검하라는 경고였다. 실제로 많은 스타트업들이 이후 급격히 채용을 줄이고, 비개발 부서를 축소하고, 현금소진율(Burn rate)을 낮추는 방향으로 전략을 선회했다. 하버드경영대학원(HBS)도 이 변화에 주목했다. 제프리 버스갱 교수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서 “스타트업 투자 시장이 위축되며 R&D와 신제품 개발 투자가 줄어들고 많은 경영방침에 변화가 올 것”이라 내다봤다.

SVB 파산 이후, 실리콘밸리의 공식은 바뀌었다. '유동성이 곧 생존력'이 되었고, 비용 효율성과 팀 민첩성은 그 어느 때보다 중시되는 핵심 역량이 됐다. 이 과정에서 AI라는 강력한 도구가 나타나면서 극한의 효율이라는 원칙을 뒷받침할 수 있게 됐다.

SVB는 무너졌지만 새로운 데이원(DAY 1)이 시작됐다. 바뀐 공식 속에서 창업자들은 다시 묻기 시작했다.

‘진짜 필요한 건 무엇인가? 지금 필요한 그것이 가짜 결핍이 아닐까’

감마는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아직도 바퀴벌레처럼 일합니다. 잘 죽지 않아요."

그 작지만 단단한 생존 의지는 오늘날 가장 혁신적인 조직의 조건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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