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게 정책은 나침반과 같다. 방향이 분명해야 길을 내고, 전략을 세우고, 투자도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기업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향을 바꾸는 나침반을 붙잡고 항해하고 있다. 전임 정부에서 추진한 규제 완화나 산업 육성 정책이 새 정부에서는 폐기되거나 반대로 전환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탈원전과 친원전, 벤처 기업 지원 정책의 대폭 확대와 정권 교체 후의 축소, 반도체 특별법이나 바이오헬스 지원 로드맵 같은 산업 전략마저도 정권 교체 이후 재검토 대상이 되는 현실은, 기업들에게 예측 불가능성과 전략적 혼란을 초래한다. 지방투자 보조금, 탄소중립 지원, 환경 규제 유예 등 실무적으로 경영전략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정책 기조가 5년 주기로 바뀐다면, 기업은 성장보다 생존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
이런 풍토에서는 기업이 자신이 가진 핵심 역량을 한 곳에 몰아 성장 동력을 만들기보다는 정책 리스크를 감안해 다양한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방어적 전략에 자원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다. 해외자원투자, 풍력발전, 플랫폼 기업 육성 정책 등 정권에 따라 부침을 겪는 사업들이 많다. 정책의 방향성이 신뢰받지 못하면 민간의 투자는 위축되고, 국가 산업 전략의 동력도 분산된다.
이처럼 정책이 리셋되는 문화의 근본 문제는 ‘정정(訂正)’의 부재다. 일본의 경영철학자 아즈마 히로키가 ‘정정하는 힘’에서 말했듯, 정정이란 “과거를 인정하면서도 현재에 맞게 해석을 조정해 나가는 힘”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과거의 정책을 전면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과는 계승하고 문제는 조정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정정’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갖춰야 한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전 정부의 주요 정책을 정책 백서로 체계적으로 평가하고, 국민과 기업 앞에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정정할지 공개하는 평가 시스템을 만들면 어떨까? 또 주요 산업 정책의 변경 시에는 기업 현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급격한 전환 대신 점진적 조정과 의견 수렴 절차를 의무화하는 정책 연속성 고려하는 제도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특히, 경제에 영향을 많이 주는 산업 전략과 관련해서는 민간도 함께 참여하는 국가 차원의 전략기구를 만들어서 새로운 정책에 대한 비토권을 줘 보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이러한 시스템은 먼 이야기가 아니다. 독일의 에너지전환정책(Energiewende, 에네르기벤데라 읽는다)은 좋은 예이다. 독일은 정권이 바뀌어도 2050년까지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핵심 기조를 유지하면서 각 정권은 그 안에서 세부 실행방안을 조정해왔다. 성급한 전환 대신 정책 정정의 과정을 제도화한 결과, 기업들은 10년 단위의 전략을 안정적으로 구사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17세기 프랑스의 재무장관이던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가 국가주도의 산업육성 전략을 주창한 이후로 ‘콜베르주의적 디리지즘(국가개입경제, dirigisme)’의 정책적 전통을 수립하고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원자력이나 항공·우주 산업등에서 국가 주도의 전략개발과 공공조달의 유지, 기술 투자를 일관되게 이어오면서 산업적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관련 기업들이 장기적인 투자전략을 수립하고, 연관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근간이 된 것이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유임시킨 결정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단순한 인사 유지가 아니라, 전임 정부의 정책 중에도 이어가야 할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 정책의 연속성을 지키겠다는 선언의 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 이런 실용적인 결정들이 축적되어 이제 우리나라도 ‘리셋’이 아닌 ‘정정’을 통한 산업발전 전략을 가져가고 기업들도 예측가능한 경영전략을 수립할 수 있지 않을까.
리셋은 기억을 지우지만, 정정은 기억을 살리며 현재를 갱신한다. 민간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정책은 성과를 계승하고 오류를 고치는 ‘정정의 힘’으로 지금의 경제위기가 극복되길 기대한다. 그래야 기업도 다시 성장에 집중할 수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