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인공지능(AI) 신약 개발 스타트업 ‘자이라테라퓨틱스’는 지난해 10억 달러(약 1조 3600억 원)를 유치하며 바이오 업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자이라테라퓨틱스는 신약 후보 물질 발굴부터 임상 개발까지 신약 개발 전 과정에 AI 모델을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당시 투자는 바이오 전문 벤처캐피털(VC) ‘아치벤처파트너스’ 역사상 최대 규모로 평가된다.
미국에서 AI 기반 신약 개발이 활발한 것은 연구개발(R&D), 데이터, 자본, 제도 등 생태계 전반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혁신 인프라가 구축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연한 개인정보 규제는 빅파마(대형 제약사)와 VC들이 앞다퉈 미국 AI 신약 개발 스타트업들과 손을 잡는 배경이다. 미국 내에서는 당사자 간 계약으로 원격진료, AI 신약 개발 등에 진료 정보를 활발하게 활용할 수 있다.
국내 산학연 및 스타트업 관계자들도 AI 신약 개발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네거티브 규제를 도입하고 그 안에서 데이터 활용의 역할과 책임, 한계를 명확히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AI 신약 개발 기업인 스탠다임의 송상옥 대표는 “고품질 데이터를 다수 보유한 국내 병원들이 개인정보 규제 등을 이유로 기업에는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은 채 병원 내부 사업에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며 “정부가 사실상 네거티브 방식으로 규제를 확 풀어줘야 병원의 데이터 독점을 막고 데이터 부족에 허덕이는 AI 신약 개발 업계도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신용정보이용 보호법)의 까다로운 가명 처리 규정을 대폭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명 처리 기준이 갈수록 강화돼 과도한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는 데다 병원이 외부에 의료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는 명분으로도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종엽 대한의료정보학회 이사장(건양대병원 의생명연구원장)은 “2020년 개정된 데이터 3법은 환자로부터 사전에 동의를 받지 않았어도 개인정보를 가명 처리하면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오히려 규제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가명 처리 기준도 올라가 원시 데이터를 가공하는 데만 연구 예산의 20~30%를 소진해버릴 때가 많다”고 지적했다.
소아희귀질환을 연구하는 조성윤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희귀질환 조기 진단을 위해 해외에서는 국가 검진 프로그램이나 빅데이터를 활용해 의심 환자를 활발하게 발굴하지만 국내에서는 지나치게 엄격한 개인정보보호법으로 인해 익명화된 데이터조차 활용하기 어렵다”며 “환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면서도 희귀질환 진단과 연구를 활성화할 수 있는 의료 데이터 활용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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