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사업을 중단하고 정조대왕급 이지스구축함을 추가 건조하는 것이 전력화시기를 더 앞당기고 해군력 증강에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정부 관계자가 최근 정치권 개입으로 사업자 선정 결정이 더 꼬여버린 KDDX 사업에 대한 답답함을 이렇게 토로했다.
“미 해군 주력인 알레이버크급 군함에 버금가는 정조대왕급 이지스구축함 수십 척을 미국과 함께 추가 건조한다면 한미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 ‘마스가’(MASGA) 성공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방산업계 관계자가 15개월 넘게 표류되고 있는 KDDX 사업의 해결책이라며 내놓은 제안이다.
7조 6000억 원 규모의 KDDX 사업은 2036년까지 6000t급 6척 건조를 목표로 하는 사업이다. 2012년 개념설계와 2023년 기본설계 이후 2024년 6월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사업자 선정을 거쳐 2029년 건조 및 시험평가를 마치고 선도함을 시작으로 2030년부터 해군에 인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간 수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사업자 선정 방식을 두고 논란이 일면서 2024년 6월에 결정됐어야 할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사업자가 선정이 1년 4개월여 지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방위사업청은 이재명 정부 들어 공정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기술자문위원회와 국회 설명회 절차를 거쳐 지난 9월 말 방위사업추진위원회(방추위)에서 최종 결정할 방침이었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개입하고 나섰다. 방사청은 KDDX 사업과 관련해 상생방안에 대한 9월 말에 있을 당정협의회 안건으로 상정해 논의하자는 요구로 사업자 선정 방식 결정을 또다시 연기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방사청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방부과 함께 비공개 당정협의회를 열어 상생 방안과 사업 방식 전반을 논의했다. 기대와 달리 논의 과정에서 제도 개정 없이는 공동 개발이 힘들고 특정 업체를 배려할 경우 담합 문제 등 법적 책임이 불거져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불어민주당은 “수의 계약이든 경쟁 입찰이든 어떻게 방식으로 갈지는 주관부서인 방사청이 결정할 문제”라며 한발 물러섰다. 결국 방사청이 책임지고 KDDX 사업을 추진해야 하는 출발 원점에 서게 되면서 여당이 이례적으로 민간 사업에 끼어들어 공정성 논란과 사업의 장기 표류만 더 조장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방사청도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기대했던 여당이 뾰족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논란만 커져 사실상 올해 안에 사업 방식을 결정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사업자 결정 이후에 체계종합업체는 수 백개에 달하는 협력업체들과 기자재 납품 및 관련된 협의가 필요해 사업 지연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관련 기자재가 제 때 납품할 수 있는지, 사업기간 지연에 따른 비용은 얼마나 더 추가될 지를 따져봐야 한다.
게다가 도급장비에 대해 일일이 협력업체들의 상황 파악 및 협상을 진행하는 것은 물론 관급으로 개발 중인 각종 핵심기술과 이에 대한 실상도 직접 짚어봐야 한다. 하지만 관급 연구개발에 체계종합업체가 배제된 채 상당기간 기술개발이 진행돼 이를 전체적으로 연동 및 통합하는 과정도 체계종합업체는 면면시 살펴봐야 하는 부담도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완성도 높은 한국형 차기 구축함 건조를 위해선 당초 일정인 2030년부터 전력화에 들어간다는 계획은 미뤄질 수 밖에 없다. 자칫 2년 이상 KDDX 전력화 차질로 해상방위 전력 구축에 커다란 구멍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이유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차라리 KDDX 사업을 중단하고 2번함까지 전력화가 시작된 정조대왕급 이지스구축함을 추가 건조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한미 조선업 협력으로 추진하는 ‘마스가’ 프로젝트와 연계해 미국과 공동 건조할 경우 시너지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기대되면서 정조대왕급 이지스구축함 추가 건조 주장론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예컨대 정조대왕급(KDX-Ⅲ Batch-Ⅱ) 이지스구축함 건조 과정에서 플랫폼과 일부 무기체계는 한국 자체 기술력으로 국산화가 가능하다.
그렇지만 미 방산업체 ‘록히드마틴’이 개발한 이지스구축함의 가장 핵심인 고성능 위상배열 레이더와 중장거리 미사일, 슈퍼컴퓨터를 통합한 첨단 방공시스템 ‘이지스 전투체계’(베이스라인 9.C2 ‘KII’)와 AN/SPY-1D(V) 첨단 레이더, 적 항공기·미사일 등 다양한 위협을 실시간 탐지·추적·요격할 수 있는 미 레이시온 테크놀로지스 코퍼레이션(RTX)의 SM-6 및 SM-3 미사일 사용을 위해선 미국 방산업체와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미 군함 건조 협력 일환으로 해군의 알레이버크급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 받는 정조대왕급 이지스구축함 추가 건조를 미국과 함께 건조한다면 한미 조선업 협력의 상징인 ‘마스가’ 프로젝트도 윈윈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미국의 노후한 군함 개량·수리와 신규 군함 건조 사업의 대표 사례로 세계 3번째 독자 이지스구축함을 건조한 한국의 조선 역량에 미국의 첨단 통합체계 기술력을 통합하면 미국의 조선업 부활 등 한미 조선산업 발전은 물론 양국의 해군력 증강을 통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할 연합 해상작전 능력 강화도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해군 입장에선 2번함까지 건조된 8200t급인 정조대왕급 이지스구축함을 당장에 추가 건조하면 KDDX 사업으로 2036년까지 건조되는 6000t급인 미니 이지스함 6척 보다 전력화 시기가 훨씬 빨라진다. 논란으로 사업이 지연된 KDDX 1번함이 2030년 해군에 첫 인도되는 것도 불확실하지만, 정조대왕급 이지스구축함은 2026년부터 건조를 시작하면 이미 검증된 기술력 덕분에 2030년까지 3척을 해군에 인도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HD현대중공업은 미 해군의 주력인 알레이버크급과 동급인 이지스 구축함을 해마다 5척까지 건조할 능력을 갖췄다고 밝힌 바 있다. 미 군사전문 매체 아미레커그니션도 지난 3월 18일 울산 본사에서 열린 한국 차세대 이지스구축함 선도함인 ‘정조대왕함’ 인도식에서 HD현대중공업은 “양국 협력이 공식화될 경우 미국 해군에 연간 최대 5척의 이지스 구축함을 건조할 수 있다는 것을 공개했다”고 보도했다.
미 해군은 연간 최소 3척의 알레이버크급 구축함을 요구하고 있지만 현재 이지스구축함 건조 능력을 갖춘 미국 내 조선소들의 총 생산량은 연간 1.6척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행사에 참석했던 미 해군성 관계자들은 이 같은 건조 능력은 중국의 해군력 팽창에 맞서 함정 증강을 서두르는 미국의 생산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전략 협력 카드라고 높이 평가했다는 후문이다.
군사전문 매체 아미레커그니션은 HD현대중공업 특수선사업부 관계자를 인용해 “HD현대중공업은 250명 이상의 엔지니어가 미국산과 동등한 성능의 이지스 구축함을 설계 및 건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며 “울산조선소 내 구축함 전용 도크는 연간 최소 1척의 알레이버크급 함정을 생산할 수 있어 미국과 협력한다면 연간 5척까지 생산을 확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한국 조선업계는 정조대왕급 이지스구축함 건조를 통해 미 해군의 알레이버크급과 동일한 성능의 이지스구축함을 미국 내 조선소 건조 소용시간 보다 3분의 1 기간 짧고 더 경쟁력 있는 비용으로 건조할 수 있다는 역량을 보여줬고 미 해군성도 이 같은 점을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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