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공약으로 검토하고 있는 ‘한국형 페어펀드’ 도입과 관련해 가장 큰 과제는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다. 민주당은 페어펀드 혹은 비슷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글로벌 선진국 대비 한국의 불공정거래 과징금 규모가 크지 않은 상황에서 기금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 예금보험기금채권상환기금의 잔여재산을 활용하는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반면, 기획재정부 등 관계부처는 정부 출연금이나 예보채상환기금이 금융소비자 피해구제 재원으로 사용되는 일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27일 정치권에 따르면 라임·옵티머스 사모펀드,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홈플러스 유동화전자단기사채(ABSTB) 사태 등으로 피해자 구제 장치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재차 커졌고 민주당도 한국형 페어펀드 도입을 골자로 한 법안을 잇달아 발의하고 있다. 이강일 민주당 의원은 불공정거래 등으로 피해를 입은 금융소비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금융투자피해보상기금 운영을 골자로 하는 금융투자피해보상공사 설립법을 조만간 발의할 예정이다. 앞서 강훈식·박상혁 의원에 이은 한국형 페어펀드 관련 세 번째 법안이다. 강 의원(투자자보호기금)과 박 의원(공정배상기금) 안이 한국형 페어펀드의 운영 주체로 금융위원회를 제시했다면 이 의원 안은 무자본 특수법인을 신설해 기금 관리와 운용을 맡긴다. 사건마다 개별 페어펀드가 만들어지는 미국과 비교하면 한국형 페어펀드는 구제 기금에 가깝다.
민주당이 구상하는 한국형 페어펀드의 가장 큰 특징은 불공정거래 행위자에 부과된 과징금에 더해 공적 자금을 재원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 의원 안은 예보채상환기금으로부터의 출연금을 기금 재원으로 명시했다. 예보채상환기금은 외환위기 당시 은행권 구조조정을 위해 지출된 공적자금의 상환을 위해 2003년에 설치됐다. 은행을 비롯한 부보 금융기관은 기금 청산 시점인 2027년까지 매년 예금 잔액의 0.01%를 특별기여금 형태로 기금에 채워넣어야 한다.
금융권에 할당된 부담액이 조기 상환되면서 2021년부터 매년 조 원 단위 잔여재산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 의원 안은 잔여재산 일부를 한국형 페어펀드 재원으로 끌어온다는 계획이다. 향후 예보채상환기금 청산까지는 약 10조 원의 잔여재산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민주당 관계자는 “과징금, 정부 차입금, 자체적인 기금 발행 채권에 더해 예보채상환기금까지 재원으로 끌어오면 최대 1조 원 안팎의 기금 조성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강 의원과 박 의원 안도 재원으로 각각 정부 출연금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수입금 등을 명시했다.
민주당이 한국형 페어펀드 구상에서 예보채상환기금, 정부 출연금 등을 재원으로 고려하고 있는 건 과징금과 부당이득판정액이 충분치 않아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선 별도의 재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공시위반 또는 불공정거래행위에 대한 과징금 부과액은 2022년 104억 원, 2023년 276억 원, 2024년 77억 원 등 매년 수백억 원 수준이다. 현행 과징금 부과 대상 위법행위가 한정적이라는 점에서 수천억 원 단위 대규모 금융 분쟁이 일어날 경우 한국형 페어펀드의 자금은 턱없이 부족할 수 있다. 과징금에만 의존할 시 문제가 된 금융사가 파산하기라도 하면 피해 구제가 더욱 어렵다.
다만, 재정 당국은 공적 자금의 용도 변경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어 구체적인 기금 관리, 운용주체, 재원의 분배 방법 등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관계부처와 이견을 좁히는 데 상당한 난항이 예상된다. 특히 기획재정부는 한국형 페어펀드에 대해 “기금이 정부재정에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며 부정적 분위기가 팽배하다. 예보채상환기금은 금융위원회의 공적자금상환기금을 거쳐 기재부의 공공자금관리기금으로도 전출되는 만큼 한국형 페어펀드 재원으로 사용될 경우 재정 당국 입장에선 ‘비상금’이 줄어드는 셈이다.
강 의원 발의 법안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기재부는 정부 출연금을 페어펀드 재원 일부로 삼는 데 대해 “사인간 위법 행위에 따른 금전손실을 재정으로 배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수용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민주당 관계자는 “예보채상환기금 잔여재산은 외환위기와 관련한 금융사에 대한 과징금적 성격도 있으므로 불공정거래 피해자 보호에 활용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다”고 반박했다.
해외의 경우 대부분 재원을 과징금이나 기여금의 형태로 조달한다. 미국은 불법 행위자로부터 징수한 부당이득환수금과 민사 절차를 통해 부과한 민사제재금을 페어펀드 재원으로 한다. 영국은 독립된 금융서비스보상기구(FSCS)가 금융사로부터 사전에 납부된 예금보험료를 바탕으로 금융소비자 피해를 보전하며, 대만의 증권선물투자자보호센터(SFIPC)는 최초 설립 당시 금융사들로부터 걷은 기여금과 금융소비자들에게서 이전받은 손해배상청구권을 재원으로 금융소비자 피해를 구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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