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에만 몰려 있는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의 대출 쏠림 현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한국은행의 지적이 나왔다. 금리를 내려도 자금이 필요한 제조업에는 돈이 돌지 않고 부동산으로만 유동성이 몰려 산업구조를 왜곡하고 더 나아가 경제성장까지 가로막고 있다는 논리다. 단순한 구두 개입 수준을 넘어 필요할 경우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규제까지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게 한은의 판단이다.
최용훈 한은 금융시장국장은 30일 “은행들이 앉아서 이자 장사를 한다는 말이 더 이상 나와서는 안 된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한은은 다음 달 3일 ‘부동산 신용 집중 개선 방안’ 콘퍼런스를 열고 이창용 한은 총재와 김병환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과 부채 문제와 관련한 끝장 토론에 나설 예정이다. ★본지 3월 14일자 8면 참조
금융·통화 당국의 수장이 한데 모여 ‘부동산 불패’의 고리를 끊어내보자는 취지다. 최 국장은 먼저 부동산 산업의 생산성이 제조업 대비 낮아 국내 경제에 왜곡을 일으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똑같은 돈이 흘러들어가더라도 국가 성장률에 미치는 효과가 낮아 경제 전반에 비효율이 생긴다는 뜻이다.
실제 국내 가계와 기업이 일으킨 부동산 관련 대출은 지난 10년간 연평균 8% 넘게 증가하며 지난해 말 1932조 5000억 원 수준까지 도달했다. 이는 전체 금융기관 신용의 49.5%에 해당하는 규모다.
제조업와 부동산·건설업 대출 비중도 이 사이 역전이 일어났다. 제조업의 대출 비중이 2008년 29.2%에서 지난해 24.6%로 쪼그라든 반면 부동산·건설업 비중은 이 기간 25.1%에서 29.4%로 늘어났다. 제조업으로 흘러가야 할 자금이 부동산으로 넘어갔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제조업에서 신용 가뭄 현상이 나타나면서 시설 투자가 줄고 이에 따라 국가 전체 잠재성장률까지 낮아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부동산 시장에 충격이 올 경우 경제 전반에 취약성이 보다 크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최 국장은 "부동산 가격이 급락할 경우 담보가치 하락으로 금융기관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고, 신용 공급 위축으로 실물경기가 침체될 우려가 더 크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대출 쏠림의 배경에는 은행들의 ‘대출 편식’이 있다고 한은은 분석하고 있다. 부동산담보대출은 기업대출보다 BIS의 위험가중자산 비율이 더 낮다. 똑같은 돈을 빌려줘도 위험도가 더 낮다고 보는 것이다. 연체 위험은 작고 안정적 수익 확보는 쉽다 보니 은행들이 부동산 대출로만 몰리고 있는 것이다.
한은은 이번 콘퍼런스에서 BIS자본규제를 포함해 부동산 대출 증가세를 억제하는 방안이 논의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동산금융에 대한 위험도를 더 높여잡는 식으로 구조적 대출 축소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주택담보대출 위험가중치가 높아지면 은행들은 자기자본을 늘리든지, 관련 대출을 줄이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최 국장은 이에 대해 “BIS 비율은 지금 당장 손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면서도 “다만 금융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투자은행(IB)과 비슷한 수준의 체질 개선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은은 부동산금융 쏠림만 줄여도 우리 경제에 상당한 수준의 잠재성장률 인상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 최 국장은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잠재성장률은 낮아지는데 부동산 가격만 오를 수도 없다”면서 “부동산에 대한 투자 행위 자체를 막자는 게 아니라 위험을 분산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최근 서울시의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에 따른 가계대출 급증세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도 내놓았다. 금융권에 따르면 3월 들어 시중 5대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이 1조 5000억 원 넘게 늘어났다. 2월 한 달간 3조 원 넘게 불어난 것과 비교하면 주춤한 모습이지만 올해 1월 5000억 원가량 줄어든 것을 감안하면 아직 안심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최 국장은 “토허구역 해제 이후 용산 등으로 확대 재지정한 조치는 생각보다 강력한 조처였지만 대출 집행은 시차를 두고 이뤄지니 4~5월 가계대출 증가세에 대해 예의 주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대출을 조이면서 금리는 내리라는 금융 당국의 ‘엇박자’ 정책 논란에 대해서는 “워낙 은행들이 예대마진으로만 돈을 번다는 비판이 나오니 대출을 다변화해 수익처를 다양화하라는 취지로 이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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