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 귀환을 한 달여 앞두고 있던 지난해 12월 19일 왕후닝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은 ‘미국에서 온 중요한 손님’을 만났다. 중국 권력 서열 4위인 왕 주석이 각별하게 맞이한 인물은 그레이엄 앨리슨 미국 하버드대 명예교수. 앨리슨 교수는 저서 ‘예정된 전쟁(2017)’을 통해 미중 패권 경쟁의 위험성을 일찌감치 예고했던 석학이다. 특히 앨리슨 교수는 해당 저서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전쟁사까지 끌어와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이라는 용어를 통해 현시대 미중 충돌 기능성을 강하게 경고했는데, 이후 중국의 군사·경제·외교적 파워가 급격히 커지면서 이는 오늘날 미중 관계를 설명하는 대표적 정치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이날 두 사람의 대화에서도 ‘투키디데스 함정’은 빠지지 않았다. 당연히 왕 주석은 앨리슨 교수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왕 주석은 “투키디데스 함정은 역사적 필연성이 아니다”라며 “미국과 중국 양국은 협력으로 서로 성공할 수 있도록 돕고 글로벌 과제에 대처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두 사람의 대화는 주미중국대사관 홈페이지에 소상히 소개됐다. ‘넥스트 키신저’ 후보로 꼽히는 앨리슨 교수를 통해 공식 출범을 앞둔 트럼프 2기 정부에 전하고 싶은 중국의 메시지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 정도 유화 제스처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통할 리 없다. 백악관으로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은 1기 때보다 더 거친 방식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재설정 중이다. 파나마 운하 통제권 회복 예고, 관세 혜택 철폐 등이 대표적이다. 중국이 미국에 내보인 반격의 패도 만만치 않다. 오히려 더 위협적이다. 그간 숨겨뒀던 중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를 세계 무대에 데뷔시키는 방식으로 우선 일격을 가했다. 미국 기업 오픈AI의 대항마 격인 딥시크는 중국 순수 국내파 연구진과 얼마 되지 않는 비용으로 챗GPT에 버금가는 추론 모델 R1 개발에 성공했다.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넘치도록 확보하고 있어 기술 패권 경쟁에서는 중국에 쉽게 밀리지 않을 것이라 자부해온 미국의 자신감이 크게 긁힌 것이다. 물론 미국을 포함해 세계 여러 국가에서 R1의 안전성에 의문을 표하며 사용 제한 등의 조치를 취하고는 있지만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서막이 제대로 올랐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그간 중국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제2, 제3의 딥시크는 언제든 등장할 수 있다. 더 격렬해지는 미중 패권 경쟁, 다시 말해 투키디데스 함정이 트럼프 1기 때보다 더 깊고 더 넓고 더 험해진 것이다.
이런 난세에 당연히 떠오르는 질문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했는가?”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중국 기술력의 파괴적 성장은 갑자기 떨어진 날벼락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체계적인 대비를 해야 했음에도 우리는 너무나 낭만적이었다. 키다리 아저씨나 변함 없는 친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무한 경쟁의 시대임에도 치밀한 시나리오 없이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는 무모한 믿음하에 시간만 허비했다.
게다가 이런 와중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았던 비상계엄과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구속 등 정치적 대참사가 벌어졌지만 그럼에도 일단 권력부터 잡고 보자는 게 정치판의 현재 행태다. 낭만이 너무 넘치는, 추잡한 수싸움 그 자체다. 수장 부재를 이유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각 부처의 행태도 마찬가지다. 현 정부 초기 신중하지 못하게 진행했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보완, 반도체 산업 R&D 인력의 ‘주52시간 예외’ 조항 마련 등 경제위기 돌파와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한시라도 서둘러야 하는 일들을 전혀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정부가 주도적으로 내놓은 대책이라고는 명절 연휴 임시공휴일 지정 하나였는데 경기가 바닥을 치는 엄동설한에 무슨 효과를 기대하고 시행했었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국격과 국력이 바닥으로 향하고 있고 국민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K반도체·K자동차·K스타트업·K뷰티 등 K파워를 한동안 자랑하더니 알고보니 끓는 물에 앉아 있는 K개구리였던가. 죽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물 밖을 둘러보고 서둘러 뛰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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