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캐나다산 원유와 가스를 제외하고 멕시코와 캐나다에 예외 없이 25%의 관세를 4일(현지 시간)부터 부과하기로 하면서 이들 국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에 비상등이 켜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국에 10%의 추가 관세를 적용하고 상대 국가들이 보복 시 관세를 더 높이겠다고 밝혀 중간재 수출이 많은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이 예상된다.
2일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9월 기준 한국의 대(對)멕시코 직접투자액은 전년 대비 60.1% 증가한 12억 700만 달러(약 1조 7600억 원)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6월 말 기준 대멕시코 투자 실적이 있는 국내 기업만 525곳에 달한다.
이는 2021년 미중 갈등 이후 멕시코가 니어쇼어링(미국 인접국으로 생산기지 이전) 핵심 지역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멕시코에 진출한 국내 기업만 해도 삼성전자와 LG전자·기아·현대모비스·한국타이어 등 가전과 자동차·철강·타이어 업체들이 망라돼 있다. 특히 멕시코 투자 업종의 84%가 자동차와 부품·가전 등 제조업이다. 이들 업체의 경우 수출 상품의 상당수가 미국으로 가는데 이번 고율 관세를 피해갈 수 없게 됐다.
실제로 기아는 멕시코 몬테레이 공장에서 ‘K4’를 연간 12만 대 생산해 미국에 수출한다. 올해는 ‘EV3’도 추가된다. 현대트랜시스와 현대모비스 역시 차량용 변속기와 자동차 부품을 멕시코에서 생산 중이다. 앞서 기아는 “가격 인상을 통한 흡수라든지 생산지 조정을 검토 중”이라고 했지만 일정 수준의 수익성 악화는 불가피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된다.
미래에셋증권에 따르면 미국의 멕시코산 제품 25% 관세 부과 시 기아의 예상 손실액은 연 9000억 원가량이다. 산업연구원은 멕시코와 캐나다에 25%의 관세가 부과될 경우 대미 자동차 수출이 최소 7.7%에서 최대 13.6%까지 줄어들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이항구 자동차융합기술원장은 “관세가 붙은 상태에서 판매를 늘리기 위해서는 할인을 대거 해야 한다”며 “완성차를 미국으로 수출하는 기업들은 결국 올해 출혈 경쟁 상태에 놓이게 돼 수익성이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가전도 상황은 비슷하다. 삼성전자는 멕시코 티후아나 공장에서 TV를, 케레타로 공장에서 냉장고와 세탁기 등을 생산한다. LG전자는 레이노사에서 TV, 몬테레이에서는 냉장고와 오븐 등을 만든다. 세탁기의 경우 삼성이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 LG는 테네시에 생산 공장을 갖추고 있지만 미국 공급 물량이 많은 TV는 관세 인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캐나다에서는 LG에너지솔루션과 스텔란티스의 합작공장이 배터리 모듈을 양산한다.
문제는 인건비와 환율 등을 고려하면 미국 현지 생산 확대에도 어려움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주제네바 대사를 지낸 최석영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트럼프 대통령이 펜타닐과 불법 이민 등을 문제 삼아 관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거꾸로 보면 이 조건이 충족되면 타협할 수 있다는 의미”라며 “이들 국가가 트럼프의 체면을 세워주면 25% 관세가 10%로 내려가는 식으로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정부 안팎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가 한국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클 수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산업연구원은 미국이 멕시코·캐나다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한국 등 주요국에 10%의 관세를 부과할 경우 한국 경제의 명목 부가가치가 2022년 대비 7조 8900억 원(0.34%) 감소할 것으로 분석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역시 미국이 양자 자유무역협정(FTA)이 있는 한국을 포함해 주요국에 보편관세를 부과하고 이들 국가가 맞대응하면 한국 수출이 최대 448억달러 감소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 경우 국내총생산(GDP)도 0.29∼0.69%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환율도 요동칠 수 있다. 최진호 우리은행 애널리스트는 “앞으로 트럼프 정책의 수위에 따라 원·달러 환율이 1470~1480원대를 재돌파할 여지를 열어둬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미국의 직접적인 타깃이 될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3개국에 대한 관세 부과를 뼈대로 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반도체와 철강 등 한국의 주력 수출품에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강조한 것도 부담이다. 미 블룸버그 통신은 “대만과 한국·베트남·태국은 중국 제품이 관세를 피해 미국으로 운송되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언급한 ING이코노믹스의 최근 보고서를 인용해 추후 “대만·한국 등 아시아 주요 국가에 대한 관세 부과도 현실화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김양희 대구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우리나라는 반도체·철강 등 미국의 부문별 관세 부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및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재협상 가능성 등에 직면에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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