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삼성전자에 다니는 한 과장급 직원의 가족상이 있어 빈소에 들렀다가 눈에 띄는 장면을 발견했다. 이 직원이 속한 팀의 임직원들이 부사장급 임원을 시작으로 10여 명 이상 빈소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회사 고위 임원의 빈소에 부하 직원들이 모여 조문객을 받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사례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 ‘조문단’은 주말 이틀 내내 빈소에 머물렀다고 했다.
이 장면에 대해 삼성전자 출신의 한 전직 고위 임원이 곱씹어볼 만한 평가를 내놨다. 이것이 바로 삼성 특유의 ‘로마 군단’ 같은 조직 문화라는 것이다. 아직도 그런 기질이 살아 있는 조직이 있어 반갑다는 소회도 덧붙였다. 삼성이 지금의 초일류를 만들어낸 배경에 일사불란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조직의 힘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자칭 타칭 로마 군단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조직은 한 군데 더 있다. 우리 경제의 컨트롤타워인 기획재정부, 그중에서도 옛 재무부가 그 주인공이다. 예산과 금융이라는 무기를 틀어쥐고 강력한 상명하복 정신으로 국가 경제 발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조직원 전체가 진군하는 모습에서 이런 별명이 붙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시장에서는 “삼성이 예전 같지 않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자주 들린다. 단순히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같은 첨단 반도체 경쟁력에서 밀려서가 아니다. 기술 수준을 넘어 조직 전체에서 과거와 같은 칼날 같은 집요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더 많다. 삼성의 반도체 수장으로 7년 만에 돌아온 전영현 부회장 역시 최근 연이어 진행되는 업무 보고 회의에서 이 같은 점을 집중 질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신들이 맡은 사업이 지난해 15조 원에 이르는 적자를 냈는데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수천만 원의 출연료를 받는 연예인들을 불러 축제를 여는 노조의 모습도 과거 삼성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전 부회장 본인이 취임사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삼성의 후퇴에는 경영진의 책임이 가장 크다. 무엇보다 삼성전자 직원들 사이에서 “우리가 대한민국을 이끄는 엘리트다”라고 하는 자부심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기술력 점검은 오히려 그 다음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이 이끌던 최정예 10군단이 아프리카 원정을 앞두고 파업에 나서자 그동안 부하들을 부르던 ‘전우 여러분(콤밀리테스)’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시민 여러분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습니다”라고 연설했다. 로마 군단에서 이탈할 수 있다는 공포에 빠진 군인들은 즉각 파업을 접었다. 로마 군단을 이끈 것은 미래에 대한 보상, 그리고 여기서 오는 자부심이었다는 의미다. 이것을 우리는 엘리트주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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