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1시간 30분가량 달려 평택고덕IC로 빠져나오자 ‘삼성로’라는 글씨가 적힌 표지판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외벽에 유명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의 작품을 연상하게 하는 그래픽을 입은 거대한 건물과 그 옆을 차지하고 있는 수십 개의 철골 구조물, 크레인이 곧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부지 면적만 ‘축구장 400개’ 크기에 맞먹는 삼성전자(005930) 평택캠퍼스 건설 현장이다.
25일 찾은 이곳은 ‘반도체 불경기’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분주했다. 삼성전자 직원들에 더해 협력사 직원, 파란색 안전모를 쓴 공사 인부 등 수천 명이 거리를 오갔고 도로에서는 삼성물산·삼성엔지니어링 등 계열사 로고가 붙은 대형 버스들이 작업자들을 실어날랐다. 협력사 차량과 공사 자재를 실은 트럭들도 수십 대가 넘었다.
매일 7만 명이 넘는 인원이 이곳을 드나든다. 진입로인 평택고덕IC에는 출퇴근 시간에만 차량 1200여 대가 오가며 상습 정체가 빚어질 정도다. 건설 현장이 워낙 광활하다 보니 부지 내 이동 시에는 공유 킥보드와 간이 셔틀버스가 주로 이용된다. 아예 ‘공유 킥보드 전용 주차장’이 돼버린 평택캠퍼스 길가 한 곳에는 얼핏 봐도 백여 대에 육박하는 공유 킥보드가 꽉 들어차 있었다.
삼성전자는 평택캠퍼스에서 1~3라인을 가동하고 있다. 내년 10월 가동을 목표로 한 P4의 경우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P5도 착공 이전에 필요한 터 다지기 등 기초공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P3 공사부터 시작해 현재는 P4 건설 현장에서 1년 가까이 일용직 근로자로 일하고 있다는 유 모(35) 씨는 “올해 초 경기가 안 좋다고 해서 공수(공사장 노동시간 단위를 의미)가 줄어드는 분위기였지만 설비 반입 등에 따라 7월부터 공수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며 “새로 유입되는 인원도 여전히 많다”고 말했다. 하청 업체의 한 관계자도 “평택 현장은 인기가 높은 편”이라며 “서울에서 가깝고 안전 관리가 잘되는 데다 일감이 장기적으로 계속 나올 것이라 오랫동안 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의 영향은 단순히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에서 그치지 않는다. 평택시 전체가 삼성전자 사업장이 첫 삽을 뜬 2015년 이후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일하는 인구가 유입되며 2015년 46만 532명이던 평택시 인구는 올해 5월 말 기준 58만 4986명까지 늘었다. 8년 만에 인구가 27% 넘게 증가한 것이다. 사업체 수 변화는 더욱 가파르다. 2021년 말 기준 평택시 사업체 수는 6만 910개를 기록했는데 이는 2015년(3만 1985개)의 2배 수준이다. 같은 기간 종사자 수도 20만 3618명에서 27만 6230명으로 35.7% 늘었다.
세금 액수도 급증했다. 평택시의 지방세 징수액은 2015년 3600억 원에서 2022년 6259억 원으로 두 배 넘게 뛰었다. 세입 재원별 현황을 따져 산출한 올해 지방세 수입 전망치는 8051억 원에 달한다. 평택시는 “올해 인구 유입 증가가 예상되면서 사업장이 늘어나고 공동주택 및 건축물의 신축도 같이 증가할 것”이라며 “지방세 세입 전망은 매우 긍정적”이라고 분석했다. 기업 투자로 늘어난 세금이 지역 개발에 다시 쓰이는 ‘선순환’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삼성 투자로 기대감이 넘치는 또 다른 경기 남부 지역도 있다. 삼성 주도의 첨단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서는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이동읍이다. 두 지역 모두 2만 명대 도농 복합 지역으로 인근 기흥·수지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더뎠다. 하지만 3월 정부가 이곳에 2042년까지 첨단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삼성전자는 20년간 총 300조 원을 투입해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중심의 생산 거점을 만들 계획이다. 규모는 평택 사업장의 2.5배 규모인 710만 ㎡. 단일 단지 기준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같은 날 오후 남사읍 일대의 유일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e편한세상 용인 한숲시티’에 들어서자 반도체 클러스터 선정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공장이 들어설 후보지 근처 농지나 임야에서는 추후 상업 시설로 개발할 수 있는 땅을 거래한다는 안내 간판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부동산들은 일제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클러스터 입지를 표시해 놓은 지도를 큼직하게 벽면에 부착해 놨다. 남사읍의 한 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반세권(반도체+세권)’이라는 말이 생겼을 만큼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관심이 많은 게 피부로 느껴졌다”며 “발표 직후인 3~4월에는 하루에 20건 넘게 거래 문의가 오고 방문객들도 수시로 이곳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기대감도 크다. 자녀 가족과 본인 가족이 모두 처인구에 거주하고 있다는 주민 임 모(65) 씨는 “삼성이 들어온다고 하니 빠르게 발전될 것 같다”며 “서울로 바로 가는 것은 광역버스 한 대가 유일했는데 도로도 뚫리고 대중교통도 훨씬 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삼성에서는 이번 투자로 인근 지역에 700조 원 상당의 직간접 생산 유발 효과, 160만 명의 고용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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