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20조 원 지원을 목표로 한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의 매입 실적이 4조 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금리 변동성이 커진 올해 하반기에는 높아진 회사채 금리 수준을 반영하지 못하고 여전히 기존 가격으로 매입해 오히려 시장을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도 불거졌다. 정부는 예정대로 SPV의 운영을 이달 말 종료하되 언제든 다시 매입할 수 있도록 비상 기구로 만든다는 방침이다.
23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올해 일몰을 앞둔 SPV는 운영 기간 동안 약 3조 7,000억 원을 소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SPV의 회사채·CP 매입 기간은 올해 1월 13일에서 7월 13일로 연장된 뒤 이달 31일까지로 재연장한 바 있다.
SPV의 매입 실적이 저조한 것은 올해 기업들의 실적이 예상보다 빠르게 코로나19 충격에서 회복하면서 주 매입 대상이던 A급 회사채들이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올해 상반기 AA급 회사채들의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자 시장에서 비교적 가격이 낮은 A급 회사채로 눈을 돌린 결과다. 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수익 기회가 줄어들면서 캐리트레이드(금리 차에 따른 수익 실현) 수요가 일부 금리가 높은 A등급 회사채로 향했다”며 “경기 부양책에 힘입어 이제껏 하향 일색이던 국내 기업들의 신용도가 상향 기조로 돌아설 것이라는 기대감도 컸다”고 평가했다. 가격 상승을 기대한 투자자들이 수익을 높이기 위해 AA등급 대신 A등급 회사채 비중을 늘렸다는 분석이다.
시장 수요가 이미 넘쳐나니 SPV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당초 SPV는 민간 채권 평가사들이 평가한 기업의 금리를 기준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회사채보다 무조건 비싸게 사도록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비우량 회사채(BBB등급) 역시 공모주 우선배정 혜택을 노린 하이일드 펀드들이 잇따라 사갔다.
그러나 3분기 이후 시장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국은행이 8월부터 금리 인상을 시작한 데다 미국도 테이퍼링(자산 매입 축소) 개시를 예고했기 때문이다. 금리 변동성이 커지자 그간 매수 일색이던 투자자들의 눈높이도 다시 높아졌다. 낮은 가격으로(높은 금리로) 채권을 사들이면 추후 금리가 인상됐을 때 평가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SPV는 이 같은 분위기에서도 시장 금리보다 1~2bp(1bp=0.01%포인트) 높은 수준으로 회사채 매입을 이어가 빈축을 샀다. 자산운용사의 관계자는 “본격적인 금리 인상 기조로 접어들면서 시장 상황이 달라졌는데 예전과 같은 가격으로 주문을 넣으니 투자자들의 불만이 컸다”며 “글로벌 금융시장에 불거진 변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시장가격을 거꾸로 왜곡한 셈”이라고 말했다.
시장 관계자들은 “SPV가 운영을 종료하는 것이 맞다”고 입을 모은다. 코로나19 여파에 따른 리스크보다는 금리 변동성과 글로벌 인플레이션 등을 우려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평가다. 한 대형 증권사의 자금 조달 담당 임원은 “10년 동안 겪어보지 못한 금리 상승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며 “높은 금리로 승부를 봐야 하는 A급 회사채에 대한 우려가 여전하지만 SPV 같은 정책으로는 지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시장 상황이 악화됐을 때 매입을 재개할 수 있도록 SPV를 비상 기구로 만들기로 했다. SPV가 금융시장에서 안전판 역할을 신속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추가 재원 조달이나 회사채·CP 매입을 재개할 수 있는 준비 상태를 유지한다는 계획이다. 내년 상반기에는 올해 상반기(약 5조 5,000억 원) 대비 1조 원 넘게 많은 약 7조 원 규모의 저신용 회사채 만기가 도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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