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부양이 다급한 정부가 내년 예산의 71.4%를 상반기에 집중 배정했다. 사상 처음으로 300조원을 넘어섰고 지난 2013년(71.6%) 이후 7년 만에 가장 예산 배정률이 높다. 일부 사업에 대해서는 아직 국회에서 예산 집행의 근거가 되는 법률이 통과되지 않았음에도 예산 배정 계획부터 짠 사업도 있다. 경기 활성화가 시급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기는 하나 하반기 재정절벽을 불러오는 등 예산 집행의 비효율성을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24일 국무회의를 열어 ‘2020년도 예산배정 계획’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예산배정은 각 부처와 기관들에 예산을 쓸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절차다. 배정이 이뤄져야 사업 주체들은 계약 체결 같은 지출원인 행위를 할 수 있다. 정부는 이달 국회를 통과한 내년도 전체 세출 예산(일반+특별회계) 427조1,000억원 중 305조원(71.4%)을 상반기에 집중 배정했다. 올해는 전체 세출 예산 399조8,000억원 가운데 70.4%인 281조4,000억원이 배정된 바 있다.
분야별 배정률을 보면 정부가 경기 부양에 얼마나 목말라 있는지 알 수 있다. 일자리 예산은 무려 82.2%를 상반기에 쓰도록 배정했다. 건설경기와 고용 유발효과가 큰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은 74.3%, 연구개발(R&D) 예산은 79.3%를 상반기에 배정했다.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경기 활성화와 관련이 큰 SOC 분야와 미래 먹거리 창출을 위한 R&D 사업 등을 상반기에 집중 배정했다”고 설명했다. 예산 집행을 위한 사업계약 공고 등을 회계연도 시작 전에 미리 시작할 수 있도록 생활 SOC와 일자리 예산을 포함시켰고 예산 규모도 올해보다 8,000억원 늘린 9조6,000억원을 배정했다.
국회가 파행을 거듭하면서 공익형 직불제(2조6,000억원)와 소재·부품·장비산업 지원 사업(2조1,000억원) 등 예산 집행의 근거 법률(예산부수법안)이 통과되지 않은 사업도 있다. 이들 사업은 각각 농업소득보전법 개정안과 특별회계기금 설치를 위한 소부장 특별법이 처리되기 전에는 집행이 불가능하다.
이같이 무작정 상반기에 예산을 쏟아붓는 전략은 씀씀이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내년 총선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눈초리도 있다. 이태석 한국개발연구원(KDI) 공공경제연구부장은 “상반기에 재정의 70% 이상을 쏟아부으면 하반기 경기 대응 여력이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최병호 부산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연초에 재정 지출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이지만 우리 경제의 전체 흐름을 놓고 봤을 때 재정이 효율적으로 집행되는 것인지는 의문”이라면서 “내년 상반기 정부 생각만큼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재정을 더 풀고자 하는 추가경정예산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정부는 이날 구윤철 기재부 2차관 주재로 20번째 재정관리 점검회의를 열어 올해 예산 집행을 재차 독려했다. 지난달 말 기준 중앙재정 집행 실적은 90.3%에 이르지만 지방재정은 77.1%에 머물러 있다. 구 차관은 회의에서 “예산을 전액 집행한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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