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배트맨 영화 가운데 최고의 역작으로 꼽히는 ‘다크나이트’. 억만장자이자 밤의 영웅인 배트맨 브루스 웨인은 집사 알프레도를 부른다. 악을 처단하러 가는 웨인은 알프레도에게 “가장 빨리 갈 수단을 준비하라”고 한다. 알프레도는 5억원이 넘는 슈퍼카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를 대기시킨다. 웨인은 람보르기니로 질주한 후 악당들을 박살낸다.
한국도 고액 자산가들을 중심으로 슈퍼카 구매가 이뤄지고 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페라리는 지난 2017년(3월 기준) 108대, 지난해 139대, 올해에는 171대가 신규 등록됐다. 람보르기니도 매년 40~60대가 등록돼 한국에 있는 차만 398대로 늘었다. 맥라렌 역시 올 3월 기준 212대가 등록되며 시장이 확장되고 있다.
이미 미국과 유럽·중동 등에서 슈퍼카는 ‘돈자랑’의 정석이다. 영화 ‘아이언맨’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도 공식적인 행사에는 럭셔리카인 롤스로이스를 타지만 개인적인 일을 볼 때는 아우디의 R8을 탄다. 고성능 스포츠카로 등장한 아우디 R8은 아이언맨 덕에 일반인들이 슈퍼카로 인식하기도 한다. 자동차 업체 입장에서도 세계가 인정하는 슈퍼카가 라인업에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자부심이다. 성능을 자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값어치를 더 인정받는 브랜드로 인식될 수 있어서다.
실제로 아우디는 경쟁 브랜드인 BMW에 비해 역동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아이언맨으로 R8을 알린 후 옥외광고로 BMW를 도발하기도 했다. BMW의 고성능 브랜드 ‘M’이 슈퍼카를 지향하는 R8보다 한 수 아래라는 것. 메르세데스벤츠도 1,000마력을 내뿜는 슈퍼카 ‘프로젝트 원’의 콘셉트카를 공개했다.
그렇다면 왜 전 세계에서 차를 가장 많이 파는 양산차 브랜드들은 단번에 ‘스타’가 될 슈퍼카 시장에 도전하지 않을까. 사실 현실적인 제약에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고 보는 게 맞다. 세계 최대 자동차그룹인 폭스바겐의 슈퍼카 사업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폭스바겐은 1997년 프로젝트명 ‘W12 나르도’ 콘셉트카를 발표하며 슈퍼카 시장에 뛰어들었다. 1998년 제네바모터쇼와 2001년 도쿄모터쇼에도 W12 콘셉트카를 내놓으며 슈퍼카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자신감의 배경은 대형 인수합병(M&A)이었다. 폭스바겐그룹은 1998년 프랑스의 하이퍼카 제조회사인 부가티를 인수했다. 같은 해 이탈리아의 슈퍼카 제조사인 람보르기니도 사들였다. 슈퍼카의 기본은 폭발적인 성능인데 세계 최고의 제조 노하우를 가진 두 회사를 품에 안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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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개발 과정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뒤따랐다. 당시 폭스바겐의 상위 브랜드인 아우디도 R8을 개발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같은 그룹사인 람보르기니는 R8의 생산을 돕느라 ‘가야르도’의 플랫폼을 내줬다. 하지만 고회전인 슈퍼카의 엔진을 식히는 냉각 기술 등은 완전히 전수하지 않아 아우디가 큰 애를 먹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람보르기니의 노하우를 모두 전수한다고 해도 문제가 있었다. 바로 “누가 폭스바겐이나 아우디 차를 최소 4억~5억원을 주고 사겠느냐”는 내부의 비판이었다. 결국 아우디는 R8을 준슈퍼카로 만들어 2억원대에 내놓는 데서 타협했다. 대중 브랜드인 폭스바겐은 아예 슈퍼카를 접었다.
국내 브랜드인 현대자동차가 정통 슈퍼카 개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룹사에서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는 폭스바겐과 달리 현대차(005380)는 고성능 엔진부터 새로 개발해야 한다. 현대차의 고성능 파워트레인의 주축은 제네시스 등에 쓰이는 람다 3.3 가솔린 터보 직분사(GDI) 엔진이다. 370마력을 내는 이 엔진으로는 슈퍼카 사업을 할 수 없다. 물론 현대차가 스포츠카 브랜드와 수천억원을 들여 600마력대의 ‘괴물 엔진’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F1 등의 무대에서 뛴 적이 없는 현대차나 제네시스의 슈퍼카를 살 고객이 많지 않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폭스바겐과 같은 고민으로, 이는 BMW가 슈퍼카 사업을 하지 않는 것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BMW는 2009년 F1에서 철수한 뒤 슈퍼카 엔진만 맥라렌 팀에 제공하고 있다. 스포츠 주행으로 정평이 난 BMW도 페라리급의 슈퍼카 시장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현대차는 대중차 브랜드의 이미지가 강하다”며 “슈퍼카로 인정받으려면 50~100년간 쌓은 브랜드 이미지와 자기만의 색깔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영원할 것 같았던 ‘슈퍼카’들의 콧대는 낮아지고 있다. 전기차의 등장으로 시장의 판이 바뀌고, 각 바퀴에 모터를 달아 구동하는 전기 슈퍼카가 나오면서다. 전기 슈퍼카가 몇십년간 숙성해온 슈퍼카들의 엔진 기술을 가뿐히 넘어버리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중국 전기차 브랜드인 넥스트EV가 만든 슈퍼카 ‘니오 EP9’이 독일 뉘르부르크링 서킷에서 6분45초9의 기록으로 람보르기니 우라칸 퍼포만테와 파가니 존다 등 슈퍼카 중의 슈퍼카의 기록을 깨버리기도 했다.
전기차의 F1인 포뮬러E도 탄생했다. 포뮬러E는 내년에 우리나라에서 열린다. 때마침 현대차의 제네시스가 지난해 전기 슈퍼카 콘셉트인 ‘에센시아’를 내놓았다. 제로백(시속 0→100㎞)은 3초 안이다. 슈퍼카 시장에서 존재감이 미미한 메르세데스벤츠가 ‘EQ 실버애로우’를, BMW가 BMW iFE 전기 레이싱카를 각각 내놓으며 포뮬러E에 야심을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슈퍼카 브랜드가 쌓아온 F1의 역사를 이제 포뮬러E에서 다른 브랜드가 대체할지도 모른다. 자동차 경주 업계의 한 관계자는 “F1도 결국 전기차로 진화할 것”이라며 “그러면 국산 전기 슈퍼카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구경우·박시진기자 bluesquar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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