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도 잦으면 이면을 보게 된다. 한번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 무심히 보기 어렵다. 요즘 삼성과 사정기관의 관계가 그렇다. 경찰·검찰·공정거래위원회 등이 삼성 그룹 차원의 중대 고비나 이벤트 날짜에 맞춰 이런저런 발표를 하고 압수수색을 하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아서다.
재계 일각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삼성을 통해 여론관리를 하는 게 아니냐”며 수군거리기까지 한다. 재계의 한 고위 임원은 “요즘 사정 당국을 보면 이 정부가 기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며 “삼성이 재계를 대표해 덤터기 쓰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씁쓰레했다.
◇삼성 합병 무효소송 1심 하루 전 압수수색=지난해 10월 18일 경찰이 성남시 분당 삼성물산 건설 부문 본사에 들이닥쳤다. 전격 압수수색 혐의는 이건희 삼성 회장 일가가 회삿돈을 유용해 보유 주택의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는 것. 하지만 시장에서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바로 다음날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 관련 무효 소송의 1심 판결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송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과 밀접히 연관돼 있고 여론의 동향이 법원 판결에 영향을 줄 소지 등을 고려하면 “이런 민감한 시기에···”라는 비판이 나올 만했다.
◇이 부회장 항소심 구형 일주일 전 공정위의 번복=지난해 12월 21일은 공정위가 자청해 굴욕을 감수한 날이다. 그도 그럴 것이 2년 전에 스스로 내린 판단을 두고 “순환출자 관련 가이드라인이 잘못됐다”며 고백성사를 했다. 공정위는 그러면서 “삼성물산 주식 500만주를 매각하라”고 삼성SDI에 요구했다.
삼성은 말문이 막혔다. 정권 교체와 함께 정책마저 손바닥 뒤집듯 하는 행태도 그렇지만 이 사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정에서 청탁 여부가 쟁점인 이 부회장의 재판과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공정위의 번복은 7일 뒤 이 부회장에 대한 검찰의 항소심 구형을 앞둔 미묘한 시점에 나왔다. 공정위 의도를 순수하게 보기 어렵다는 말이 많았다.
◇이 부회장 석방 3일 뒤 다스 관련 압수수색=올 2월 5일 항소심에서 이 부회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 날 삼성은 극도로 몸을 사렸다. 1심과는 결 자체가 완연히 다른 판결이 나온 만큼 자칫 역풍이 불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기대감이 적지 않았다. 이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 복귀해 삼성 특유의 ‘스피드 경영’이 부활하고 사업 재편 등 큰 그림도 구체화 되리란 희망이 새 나왔다.
하지만 이런 전망은 3일 만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검찰이 다스 관련 소송비를 대납한 의혹이 있다며 삼성전자 사옥을 전격 압수 수색했기 때문이다. 의혹은 의혹대로 풀어야겠지만, 항소심 판결로 여론이 나빠지자 사정기관이 또 움직이는 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시장에 나돌았다.
◇‘어닝 서프라이즈’ 잔칫날에 찬물 끼얹은 검찰=지난 6일은 삼성전자의 저력을 다시금 확인한 날이다. 올 1·4분기 영업이익으로 15조 6,000억원을 올려 또다시 최고치를 경신했기 때문이다. 무려 4분기 연속이었다.
그러나 ‘삼성 맨’은 웃을 수 없었다. 바로 이날 단행된 검찰의 압수수색이 원인이었다. 대상은 삼성전자 서비스. 삼성의 ‘노조 와해 의혹’과 관련해서다.
재계에서는 “이런 분위기라면 이 부회장의 경영일선 복귀가 더 늦어질 거 같다”는 말이 나왔다. 삼성이 느끼는 위기감은 더 크다. 이번 일이 삼성 경영진에 대한 조사로 연결될 가능성 때문이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미·중 통상분쟁, 원·달러 환율 등 대외 여건도 어려운 터라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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