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뜻을 세워 목적을 달성한 사람을 우린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이 사회가 입지전적인 인물이 나올 수 없는 환경이라고 푸념을 하곤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자조 섞인 신조어 ‘흙수저’가 대한민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단한 노력으로 평범한 현장 보험설계사에서 글로벌 보험기업 최고경영자(CEO)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 있다. 바로 차태진 AIA생명 한국지점 신임 대표다. 포춘코리아가 국내 보험업계 최초 보험설계사 출신 CEO인 차태진 대표의 인생역정을 따라가 보았다. 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차태진 신임 대표는 생명보험업계에서 21년 이상 경력을 쌓은 보험전문가입니다. 업계 전반에 걸친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지속적이고 탁월한 성과를 창출한 전략 영업, 마케팅, 조직혁신 전문가로서, (회사에) 큰 역할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빌 라일 AIA생명 아시아 지역총괄 CEO가 차태진 신임대표를 선임한 후 한 말이다. 그러나 차 대표에 기대감은 AIA생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국내 보험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차 대표에게 거는 기대감은 상당하다. 12년 차 보험설계사 김경순(43) 씨는 말한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억대 연봉을 꿈꾸는 보험설계사가 많았습니다. 노력 여하에 따라 많은 수당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최근 보험설계사 시장은 그야말로 싸늘합니다. 온라인 채널을 통해 보험에 가입하는 비율이 전체 보험 가입자의 70% 이상이니까요. 가입이 간편하다는 장점도 분명 있지만, 보험설계사를 통해 가입하면 보험비가 비싸다는 통념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어요. 그래서 보험설계사들은 차태진 대표의 CEO 취임을 특별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설계사 출신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저희의 상황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김 씨가 말했듯이 차 대표는 보험설계사 출신이다. 지난 1995년 푸르덴셜생명에 보험설계사로 입사해 보험업계 입문 20여 년 만에 글로벌 보험업체 대표에 올랐다. 이미 차 대표는 취임 전부터 보험업계에선 유명인사였다. 단순히 보험을 많이 판매해서가 아니라, 지금 위치에 오르기까지 그가 해온 각고의 노력이 보험설계사 사이에서 본보기가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땀에 젖은 옷, 노력의 중요성을 알다
어린 시절 그는 신문 배달을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한 건 아니었다. 신문 배달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아버지의 권유가 있었지만, 그가 진짜 신문 배달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용돈을 벌 수 있다는 현실적인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신문 배달을 했다. 그의 옷은 금방 땀에 젖었다. 땀에 젖은 옷이 새벽녘 찬바람에 식어 서늘해질 때 그 기분이 너무 좋았다.
차 대표는 말한다. “물론 힘들었습니다. 특히 ‘그만 넣으라’는 구독자들의 차가운 말이 어린 저에게 꽤나 가혹하게 들렸죠. 그래도 묵묵히 배달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땀 흘리는 것이 기분 좋게 느껴지더니, 신문기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다는 건 매우 기분 좋은 일이더군요. 더 신이 났어요. 늦지 않고 묵묵히 배달했더니 ‘저 녀석 성실하네’라는 동네 어른들의 칭찬도 들을 수 있었죠. 구독자도 꽤 늘어났고요. 그렇게 3년간 신문 배달을 했습니다. 저는 그때 땀의 의미를 알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때 흘린 땀의 의미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는 신문 배달을 하듯 공부도 열심히 했다. 서강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해 최우수 졸업생이란 영예도 안았다. 그땐 장밋빛 미래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지원서를 넣었지만 돌아온 것은 불합격 통보 뿐이었다. 결국 그는 전공을 살려 1992년 글로벌 경영컨설팅회사 액센츄어(Accenture)에 입사해 사회 초년병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이야 경영 컨설팅 업무가 주목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경영 컨설팅은 개념조차 생소한 분야였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일했다. 고된 업무는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줬지만, 정신만은 살아있었다. 그는 땀과 노력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2년간 액센츄어에서 근무한 차 대표는 능력을 인정받아 전략 컨설팅 전문기업 베인앤컴퍼니코리아(Bain & Company Korea)로 스카우트됐다. 차 대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주당 90시간을 근무했습니다. 주말 없이 매일 10시간 이상 일을 했죠. 하루에 200권의 컨설팅 리포트를 제본하기도 했습니다. 그 덕에 사내에서 ‘카피맨’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죠. 고객 기업임원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창의적인 전략 메시지를 만드는 일을 할 땐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거 같아요.
어느 순간 경영컨설팅이라는 일을 너무나 사랑하는 제 모습을 발견한거죠. 그때까지 가져왔던 모든 불만이 눈 녹듯 사라지더군요. 까칠한 선배의 지시도 이해할 수 있었고요. 당시 5년간의 경험이 저에겐 소중한 자양분이 됐다고 믿고 있습니다.”
경영 컨설턴트에서 보험설계사로 변신
경영 컨설턴트로 잘 나가던 차 대표에게 변화가 찾아온 건 그가 생명보험사 컨설팅 업무를 맡게 되면서부터다. 그는 보험시장을 분석하며 이 시장에 무궁무진한 성장 가능성이 있음을 확신했다. 보험업계로의 전직을 결심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걱정 어린 주변의 시선 뿐이었다.
전직 그 자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선택한 업무가 보험설계사였기 때문이었다. 보험설계사는 직접 고객을 찾아다니며 보험상품을 팔아야 하는 세일즈맨이라 사회에서 바라보는 편견이 예상보다 컸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 편견에 맞서기로 결심했다. 물론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오히려 차 대표의 도전의식을 자극했다. 차 대표는 말한다. “당시 한 선배로부터 세일즈 중 보험 세일즈가 제일 힘들고 거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두려움보단 호기심이 발동하더군요. 뭐 때문에 가장 힘들다고 하는 걸까? 일단 몸으로 부딪혀보자고 생각했죠.”
그러던 중 그는 푸르덴셜생명이라는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됐다. 국내 시장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글로벌 보험회사지만 성장 잠재력만큼은 크다는 정보였다. 차 대표는 무작정 푸르덴셜에 전화를 걸었다.
“에이전트(푸르덴셜에서 사용하는 보험설계사 용어)가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죠?” 그리고 그는 ‘밑바닥’부터 도전을 시작했다. 보험업계로의 전직을 결심한 지 불과 한 달 반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1995년 푸르덴셜생명에서 보험설계사로 새 출발을 했다. 그때만해도 지금의 위치에 오를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치열하면서도 차별화된 노력
1995년 12월 말 푸르덴셜에 입사한 그는 한 달간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았다. 에이전트가 되기 위한 각종 소양과 보험상품에 대한 교육을 이수했다. 그리고 에이전트 차태진의 출근 첫날이 밝았다. 새벽 5시, 그는 아직 어두운 새벽길을 헤치고 사무실로 향했다. 당연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차 대표는 그날 밤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에이전트가 되자고 결심했다. 이후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5시에서 5시 반 사이에 출근길에 올랐다. 6시부터 일을 시작해 자정 무렵까지 근무했다. 심지어 면도까지 회사에 가서 했다. 당시 근무를 함께 했던 차 대표의 지인들은 그가 경비원들 사이에서 ‘골칫거리’로 불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차 대표는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자신이 경비원들의 골칫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저는 저 자신을 프로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해선 준비과정이 필요하죠. 교수가 강의를 하기 전에, 의사가 수술하기 전에 반드시 준비를 해야 하듯이, 세일즈맨도 고객을 만나기 전에 반드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충실한 준비 과정이 수반되면 모든 상담과 판매 과정에서 자신감이 생기니까요.”
차 대표는 출근 직후 그날 만날 고객 명단을 확인해 그들의 성향과 정보를 꼼꼼히 분석했다. 고객에게 생명보험의 가치를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생각하고 메모했다. 차 대표와 함께 근무했던 보험업계 종사자 A 씨는 당시 차 대표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했다. “정식 출근 시간이 8시 30분이었습니다. 저희가 사무실로 들어갈 땐 차 대표는 사무실을 나오고 있었죠. 그때부터 현장 업무를 시작한 거였어요. 당시 차 대표는 적어도 일주일에 15명의 신규 고객을 만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성실과 근면의 상징이었죠. 그가 3년 연속 에이전트 챔피언에 오른건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죠.”
차 대표의 또 다른 노력은 ‘투자’에서 찾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에이전트 차태진, 자신에 대한 투자였다. 그가 보험업계 입문 후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은 양복 두 벌이었다. 당시만 해도 널리 쓰이지 않던 휴대폰과 노트북도 구입했다. 그는 자신을 개인 사업자라고 정의 내렸다. 사업적 관점에서 나만의 업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선 그에 필요한 투자가 필수라고 여겼다. 그는 끊임없이 업무 효율성을 높였고, 보는 이들이 차별화된 에이전트라는 이미지를 갖도록 자신을 담금질했다.
백만달러 원탁에 앉은 열혈 설계사
차태진 신임 대표를 수식하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단어는 바로 ‘챔피언’이다. 그는 푸르덴셜 근무 당시, 3년 연속 챔피언 에이전트 등극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쉽게 말해 보험왕에 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3년 연속 보험왕에 올려놨던 것이었을까?
A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한다. “차 대표의 입사 첫해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챔피언 등극이었어요. 사실 목표는 누구나 세울 수 있는 거죠. 그래서인지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였습니다. 이제 막 보험업계에 입문한 초짜 에이전트가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보험왕에 오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거든요. 실제로 차 대표의 초창기 실적이 그리 좋지 않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여름 무렵이 되자 반전이 일어났어요. 하위권에 머물던 차 대표가 중위권에 오르더니 급기야 선두권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오르더군요.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차 대표의 무모한 도전을 호기심을 갖고 지켜봤습니다.”
차 대표는 ‘매주 세 건 이상 신규 계약 달성’이라는 나름의 목표를 세우고 이를 이뤄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결국 신입의 패기는 결실을 맺었다. 2위와 꽤 격차를 벌리며 챔피언에 올랐다. 신입 1년 차로선 하기 힘든 시니어 에이전트(150건 이상의 계약을 달성한 에이전트를 지칭하는 용어)에 오르며 전 세계 고소득 생명보험설계사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백만달러 원탁회의(MDRT)’의 회원 자격도 얻었다.
차 대표는 이후에도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보험업계에 정식으로 입문한 1996년을 시작으로 1997년과 1998년에 잇달아 보험 챔피언에 올랐다. 1999년 김대중 정부에서 발표한 ‘금융 분야 신지식인’에 선정된 데 이어 한국 MDRT의 초대 회장까지 맡아 명실공히 국내 최고 보험설계사임을 대내외에서 인정 받았다.
차태진 대표의 능력은 다른 경쟁사가 탐내기에 충분했다. 그는 새로운 꿈을 위해 지난 2001년 메트라이프생명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둥지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지점 ‘메트라이프 CNP(Cha & Partners) GA(General Agency)’의 대표로서 자신만의 사업체를 운영하게 된 것이었다. 메트라이프의 GA는 일반 지점과 달리 개인사업자 개념이다. 본사에서 일정 수준의 규모와 영업력을 인정받은 곳을 GA라 일컫는다.
차 대표는 직접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며 에이전트를 양성했다. 선배의 노하우를 학습한 후배들은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차 대표 역시 물심양면 지원을 하며 사기를 북돋웠다. 그 결과 차 대표의 CNP는 2006년 전체 2위에 이어 2007년에는 전체 1위에 등극했다. 회사를 옮겼어도 차 대표 특유의 ‘챔피언 DNA’가 없어지지 않은 셈이었다.
설계사들의 롤모델 1순위
차태진 대표는 보험설계사들 사이에서 대표적인 롤모델로 꼽힌다. 입지전적인 그의 성과 때문만은 아니다. 누구보다 설계사들의 마음을 잘 읽고 그들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그의 진심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차 대표는 지난 2009년 메트라이프생명 영업총괄 상무에 취임하며 처음 임원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임원이 된 후에도 책상 앞 대신 영업 현장을 누비며 업무에 임했다. 설계사 출신답게 소속 설계사들의 자신감 고취를 위해 여러 가지 전략을 펼쳤다.
메트라이프생명과 관계를 맺어온 독립법인 대리점을 모두 전속지점으로 바꾸는 특단의 조치를 단행해 설계사들에게 활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그가 지난 2014년 ING생명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도 그의 직책은 영업총괄 부사장이었다. 영업조직 강화와 설계사들의 자신감 고취라는 영업의 핵심 과제를 해결하는 데 차 대표만한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는 보험업계 최초의 설계사 출신 CEO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타이틀을 달았다.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적어도 차태진 대표의 삶에 ‘운’이란 건 없었다고 말한다. 그가 CEO에 오른 건 약 20여 년간 보험업계에서 보여준 그의 치열한 노력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라는 것이다. 그가 AIA생명에서 보여줄 또 한번의 성과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