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우여
정태원<당시 로이터통신>
87년 6월9일 연대 교문앞 학생과 경찰간에 화염병,최루탄이 오가고 공방이 벌어졌다. 20m앞에서 한 학생이 머리에 손을 올리고 비틀거렸다. 최루탄을 맞은 듯 했다. 고통스러워 하는 학생을 또 다른 학생이 뒤에서 껴안으며 일으켜 세웠다. 모터드라이브를 사용, 20컷을 순식간에 찍었다. 학생은 절망적으로 보였다. 이 한 장의 사진은 6ㆍ10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아! 나의 조국-AP통신 선정 20세기 100대 사진
고명진<뉴시스 사진국장>
나는 사진기자로서 현장에 대한 욕심이 많아 큰 집회가 있을 때는 자원해서 가는 편이었다. '나의 조국'을 찍은 87년 6월26일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은 당시 물고문으로 죽은 박종철군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시위현장을 물어물어 찾아가 공사중인 역에 올라가 사진을 찍으려는데 예상치 못한 장면이 연출됐다. 딱 한 컷을 찍고 보니 태극기가 젖혀져 버렸다. 사진을 찍으면서 '바로 이거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진이 너무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다음날 지면에 실리지는 못했다.
쿠테타의 주역들
김천길<전 AP통신>
61년 5월18일 혁명을 지지하는 육사생도를 사열하고 있는 쿠데타 주역들의 사진. 김천길 기자는 생도들이 시청 앞을 통과할 때 박정희를 둘러싸고 있는 청년 장교들의 모습에 이상한 긴장감이 흘러 셔터를 눌렀다고 했다. 이 사진은 혁명주체의 상징이 됐고, 이 사진 속의 인물중 일부는 20년 후 흉탄에 생을 마감하는 비운을 맞았다.
추락하는 진압 경찰
김재영<당시 연합뉴스>
98년 12월 23일 조계사 총무원 건물에 대한 퇴거집행에 나선 경찰관들이 진압도중 사다리가 무너져 추락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많은 일간지 1면에 내 사진이 실리는 짜릿함을 맛보았다. 해를 넘기며 보도사진전 대상을 포함해 몇 가지 상도 받았다. 또 얼마가 지난 후 회사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호출기가 울렸다. 회사에 전화를 했더니 월드프레스포토에 출품했던 내 사진이 금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궁'자 지우기
석동률<동아일보>
88년 8월은 5공 비리로 떠들썩했다. 연희입체교차로를 지나던 내 눈길이 방향표시문구에 머물렀다. '연희궁'은 인구에 회자되는 말일 뿐 공식 명칭일 리 없었다. 시청 담당부서에 전화를 걸어 연유를 물었더니 담당자는 시치미를 뗐다. 다음날 다시 찾은 그 도로 위의 표시는 '궁'자가 지워져 있었다.
질식직전의 국회의장 윤여홍<국민일보>
예산안처리 법정 시한인 93년 12월2일, 예산안 및 추곡수매안을 둘러싸고 여야가 팽팽한 대립을 하고 있었다. 민자당 의원들이 황낙주 부의장을 앞세우고 들어오자 민주당 의원들도 힘으로 밀어붙였다. 황부의장은 목이 감기고 입이 막혀 있었다. 나는 '저러다 황부의장이 죽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에서 플래시 불빛이 터졌고, 나도 연속으로 석 장을 눌렀다.
계란 맞는 YS
고영권<한국일보>
99년 6월3일. 김영삼 전대통령의 방일(訪日)이 예정돼 있었다. 공항에 도착해 뷰파인더를 들여다 보면 사진을 찍고 있는데 무언가 공중으로 날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반사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달걀 안에 든 붉은 페인트로 YS의 얼굴은 범벅이 됐고, 범인은 경호원들에게 끌려갔다. 회사로 돌아와 필름을 현상해 보니 두번째 컷에 그 장면이 잡혀있었다. 달걀을 맞는 YS의 얼굴은 사태파악을 못한 듯 웃고 있었고, 손명순 여사도 웃고 있었다. 내 평생 잊지 못할 1/250초의 짧은 순간이었다.
8ㆍ15 저격사건
임희순<당시 조선일보>
박정권때는 경호가 삼엄해서 먼거리에서 대통령 연설 사진을 찍고 퇴장하는게 관례였다. 74년 8월15일도 쫓겨나듯 로비로 나와 서성댔다. 10시12분 '탕'하는 소리와 함께 박대통령의 연설이 끊기고 다시 3~4발의 총성이 들려 장내로 뛰어들어갔다. 장내는 아비규환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지금도 육여사 홀로 고개를 뒤로 제친 채 쓰러져 있던 쓸쓸한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분신자살
권주훈<당시 한국일보>
86년 5월 20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문익환목사의 강연을 듣고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학생회관으로 쏠리는 것과 동시에 카메라를 돌렸다. 온몸에 불이 붙어 떨어지는 학생을 본능적으로 찍었다. 학생은 절명 상태였고,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학생은 서울대 농대 원예학과 1학년 이동수였다. 이군의 책상 위에선 '민중은 말이 없고, 우둔하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쪽지가 발견됐다.
탈출-72년 암스테르담 세계보도사진전 2위
김동준<전 서울신문 사진부국장>
71년 성탄절, 대연각 호텔에서 불이 나 171명이 사망했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어디에 카메라를 갖다대야 할 지 모를 정도였다. 11층과 12층에서 남자 두 명이 매트리스를 안고 뛰어내릴 듯해서 정신 없이 셔터를 눌렀다. 현장에 사진기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남 보다 좋은 사진을 찍을거라고는 생각 조차 못했다.
/한국사진기자협회 발간 ‘나의 취재기’ 발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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