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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말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는 45℃를 넘나드는 폭염의 도가니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MERS) 종식이 선언되지 않았던 데다 폭염 속에 중동 출장은 무리라는 반대의 목소리가 거셌다. 하지만 김기문(60) 로만손 회장은 이런 만류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로만손 시계 사업을 다시 일으키려면 무너진 중동 네트워크를 복원하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수행원 한 명만 데리고 중동 3개국을 닷새 만에 돌며 현지 바이어들을 만나 설득에 나섰다. 매장을 직접 돌며 제품의 특장점을 세세하게 소개했고, 로만손이 앞으로 펼칠 마케팅 정책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김 회장이 중동 지역에 특화된 마케팅 전략을 제시하자 그동안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던 해외 바이어들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였다.
11일 로만손에 따르면 김 회장은 8년여의 중소기업중앙회장 임기를 마치고 일선에 복귀한 이후 5개월 동안 두바이,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카타르 등 중동 지역을 누비며 영업 전선을 다잡았다. 그가 오간 거리를 환산하면 지구 3분의 1바퀴를 넘는 1만 마일(1만 6,000㎞)에 달한다. 김 회장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자 굼뜨기만 했던 중동 사업도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에 116개 매장을 확보하고 있는 알샤야 그룹과의 계약 체결. 2년 전부터 로만손 해외사업팀이 알샤야 그룹과의 계약을 추진했지만 뚜렷한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김 회장이 지난 5월과 7월 직접 중동으로 날아가 이슬람 문화에 적합한 광고 시안을 제안하고, 사우디아라비아 부유층을 위한 전용 다이아몬드 시계 제품을 출시하겠다고 전격 제안하자 바이어가 그 자리에서 계약서에 사인했다.
이번 계약 하나로 올해 200만 달러(약 23억 5,000만원)의 매출 증대 효과가 기대된다. 특히 이슬람권에서 행하는 금식 기간인 라마단 기간 이후 진행되는 메카 성지 순례(하지)에 300만명 이상의 방문객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몰려들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로만손'이란 이름도 중동에서 위상을 공고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 오는 10월 두바이와 카타르 도하에서 대대적인 론칭 쇼까지 열릴 예정으로, 중동 수출이 탄력을 받으며 '로만손의 르네상스 시대'가 본격 개막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등 주요 6개국과 핵협상이 타결된 이란 시장도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이란 주요 도심 지역의 메가몰과 쇼핑몰에 입점해 있는 로만손은 현지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고, 이런 인기에 힘입어 단독 매장을 추가하기로 했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 이란 시장 수출 목표인 500만 달러(약 58억7,000만원) 달성도 무난할 것으로 회사 측은 기대하고 있다. 이 밖에 2022년 월드컵 개최로 주목 받고 있는 카타르에서는 도하 공항 면세점에 입점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인접국인 오만에서도 파트너십을 맺고 유통망 확보에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김 회장은 "시계 사업의 특성상 바이어보다 더 많은 지식으로 철저하게 무장하고 접근해야 하는데 지난 8년여간 바이어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로 로만손의 뿌리인 시계 산업이 퇴보하고 있었다"면서 "로만손에 복귀한 후 중동 지역의 무너진 네트워크를 복원하는 데 내 모든 힘을 기울였고, 지금은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는 만큼 로만손의 '중동 부흥'은 시간 문제"라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이런 추세라면 내년 중동 지역에서 1,000만 달러(약 117억4,000만원) 매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제로 2012년 312억원이었던 시계 매출은 2013년 310억원, 2014년 276억원으로 감소세를 보였다. 특히 시계 수출이 2012년 202억원에서 2013년 169억원, 2014년 108억원으로 최근 3년 사이에 반 토막 나면서 위기감이 커졌다. 하지만 김 회장이 직접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선 만큼 로만손의 중동 사업 재건은 청신호가 켜진 것으로 업계에서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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