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정부·한국은행)에서 뿜어낸 혈액(돈)이 몸 구석구석에 퍼지지 않고 특정한 곳(부동산·단기금융상품)에만 집중되는 경제 불균형이 심화하고 있다.
은행 주택담보대출은 사상 최대폭으로 폭증했으며 단기 부동자금 집합소인 머니마켓펀드(MMF) 잔액도 10년 만에 가장 크게 불었다. 반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인 1.75%로 낮춘 지난 3월에도 경제 전반에 돈이 원활히 순환하는 정도를 보여주는 통화승수는 오히려 사상 최저로 곤두박질쳤다. 돈을 풀어도 특정 부문에만 집중되는 '돈맥경화', 실물경제를 부양하지 못하는 '유동성 함정' 징후가 짙어지고 있는 셈이다.
14일 한국은행의 '3월 중 통화 및 유동성'을 보면 일단 시중에 돈은 무섭게 풀리고 있다. 돈이 풀린 양을 보여주는 광의통화(M2) 잔액이 2,128조3,000억원(계절조정, 평잔)으로 지난해보다 8.3% 급증했다. 증가율은 2010년 8월(8.7%) 이후 4년7개월 만에 최대다. 지난해 경제성장률(3.3%)의 두 배가 넘는다. 통상 경제가 팽창할수록 통화량도 늘기 마련이지만 속도가 너무 빠르다.
하지만 풀린 돈은 대부분 부동산 시장에 몰리고 있다. 이날 한은은 은행 주택담보대출 잔액이 4월 말 현재 426조5,000억원(모기지론 양도 포함)으로 전월보다 8조원 폭증했다고 밝혔다. 증가폭은 통계가 집계된 2008년 2월 이후 최대다. 월간 증가폭이 8조원을 찍은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주담대의 절반가량은 주택 구입 용도로 쓰인다. 주담대가 크게 불어나 은행 가계대출 잔액도 579조1,000억원으로 전월보다 8조5,000억원 불었다. 증가폭은 역시 사상 최대다. 단기투자 대기소인 MMF 잔액도 폭증하고 있다. 3월 75조1,841억원(평잔, 원계열)으로 1년 새 23조원(44.9%) 불었다. 2005년 이후 약 10년 만에 최대 증가율이다.
정상적인 경제라면 정부와 중앙은행이 뿌린 돈은 자산, 금융시장을 거쳐 실물경제로 파급되고 결국 통화승수도 자연스럽게 반등한다. 하지만 우리는 풀린 돈이 부동산·MMF에만 몰려 있다. 그러다 보니 3월 통화승수는 오히려 사상 최저로 주저앉았다. 18.3배로 2월 18.8배에서 하락했다. 통화승수는 중앙은행이 푼 돈이 시중은행을 거쳐 몇 배의 돈을 창출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경제 전반에 돈이 원활하게 순환하면 수치가 상승한다.
김천구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준금리 조정은 약 6개월의 시차를 두고 경제에 영향을 준다"며 "지난해 8월과 10월 금리를 인하했으므로 지금쯤 풀린 돈이 실물경제에 흡수돼 통화승수도 자연스레 올라가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도 "2000년대 초반 25배에 육박했던 통화승수가 18배까지 추세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며 "경제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으로 아무리 돈을 풀어도 경기가 살지 않는 '유동성 함정' 문제를 겪은 1990년대 일본의 초기증세가 나타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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