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룸버그는 여전히 엄청난 수익을 내고 있다. 하지만 성장세는 주춤하다. 스누핑 snooping 스캔들 *역주: 고객들의 단말기 사용정보를 무단으로 사용한 것이 발각된 사건과 언론사로서의 독립성에 대한 의문점으로 명성에도 타격을 입었다. 블룸버그는 신·구 파벌과 최근 복귀한 마이크 블룸버그 Mike Bloomberg와의 내부 갈등 속에서 과연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을까?
By Peter Elkind
Photograph by Tom Schierlitz
올해부터 블룸버그 LP(Bloomberg Limited Partnership)로 복귀한 마이크 블룸버그는 자신이 없는 동안 회사가 엄청나게 성장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가 설립한 데이터 미디어 거물 블룸버그 LP의 매출은 그가 뉴욕 시장직을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12년 동안 3배나 증가했다. 작년에는 톰슨 로이터 Thomson Reuters(이하 로이터)를 추월하며 세계 최대 금융서비스업체로 등극했다. 버튼 테일러 인터내셔널 컨설팅 Burton-Taylor International Consulting의 더글라스 테일러 Douglas Taylor에 따르면, 블룸버그의 2013년 매출과 이익은 각각 83억 달러와 27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할 전망이다.
어떻게 봐도 블룸버그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블룸버그의 맨해튼 본사는 분명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30년간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데이터 단말기 판매는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전력질주만 해오던 블룸버그는 지금 한계에 부딪힌다는 게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다.
그 결과 고통스러운 정체성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한 가지 제품으로 성공가도를 달려왔지만-동시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독특한 방식을 고수해 왔다-미래를 대비하지 않고, 기존 방식 수정을 거부한 기업에 관한 것이다. CEO 댄 닥토로프 Dan Doctoroff가 사업을 다각화하고 혼란스러운 기업-고함을 치고 내부 갈등을 빚는 것은 경영진의 고질병이었다-에 질서를 확립하려는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긴장감이 고조된 것이다. 마이크-기업명과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기업 내에서처럼 ‘마이크’라 부르겠다-시절의 한 전직 이사는 “그의 경영 철학은 ‘고양이 다섯 마리를 가방 안에 넣고 싸우게 하는 것’ *역주: ‘two cats in a bag’이란 말을 응용한 것으로 서로 물고 뜯는 치열한 경쟁을 의미한다”이라고 설명했다.
닥토로프는 블룸버그의 전략을 재정비 해왔다. 여태껏 단말기는 블룸버그의 핵심 사업이었고, 토템처럼 신성시 돼왔으며, 매출의 85%를 차지해왔다(사실상 회사 이익 전체에 해당한다).
부수적 사업에 사용된 거의 모든 비용은 단말기 판매에 도움이 된다는 모호하면서도 강력한 명목 하에 정당화 되었다. 닥토로프는 일반 기업에선 당연시되는 기초 원칙들을 블룸버그에 도입하려고 애써왔다. 블룸버그는 이런 원칙을 일종의 ‘이단(heresy)’처럼 취급해 왔다. 닥토로프의 대담한 시도란 기껏해야 단말기 외에도 다른 수입원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였다.
닥토로프의 노력은 심지어 그가 마이크의 확실한 지지를 받았을 때도-마이크는 매주 CEO와 이야기를 나눴다-내부 저항과 간헐적인 실수 탓에 무위로 돌아가곤 했다. 그 결과 블룸버그는 사업다각화에 20억 달러를 투자했음에도, 여태껏 어떠한 가시적 성과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블룸버그의 전·현직 이사 및 기자 82명을 인터뷰한 결과, 이건 최근 시련들의 시작에 불과했다. 블룸버그의 뉴스부문은 한 때 내걸었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가 되자’는 슬로건을 내려놓았다. 언론으로서의 역할과 도덕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 두 사건으로 인해 블룸버그 뉴스는 명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한 사건은 블룸버그 뉴스의 리포터가 한 고객을 염탐하기 위해 단말기를 이용한 사실을 인정한 것이었고, 두 번째 사건은 중국 정부의 반응을 우려해 중국인 억만장자에 대한 기사를 내렸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은 일이었다. 그러나 블룸버그 측은 이를 강력 부인하고 있다(물론 포춘이 블룸버그의 뉴스 및 잡지부문의 경쟁사인 점은 참고해야 한다. 포춘의 모기업인 타임 Time의 콘텐츠 부문 최고책임자 노먼 펄스틴 Norman Pearlstine은 블룸버그에서 5년간 근무 한 뒤 지난해 11월 타임으로 복귀했지만 펄스틴은 이번 기사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론 부족했다는 듯, 올 초 블룸버그 지분의 85%를 보유한 창업자가 돌아와 경쟁에 참여했다. 마이크의 뉴욕 시장 임기는 신년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종료되었고, 그는 다시 본사로 돌아왔다. 마이크는 경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향후 계획도 불확실한 것처럼 보인다(포브스에 따르면 310억 달러라는 막대한 자산을 보유한) 마이크는 어떠한 역할을 하든, 이익창출보다는 영향력 증대에 더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여러 방면에서 손이 묶여 있는 닥토로프에겐 이 상황이 경영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악재다. 그는 연립 정부의 총리 같은 존재였다. 기업 운영을 위해 재원을 관리하고, 의사결정권을 가진 강력한 총리들뉴스부문 사장 맷 윙클러 Matt Winkler와 단말기 부문 사장 톰 세쿤다 Tom Secunda-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포춘과의 긴 인터뷰 동안 닥토로프는 그와 마이크의 관계를 “환상적”이라고 표현했고, 그의 복귀를 고대했다고 말했다. 닥토로프는 “우리는 모든 문제에 대해 의견이 일치했다”고 주장했다(마이크는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그의 확신과 블룸버그의 자신감 기저에는 근원적이고 언급되지 않은 취약점이 도사리고 있다. 수십 년간-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업계에서는 수세기와 맞먹는 시간이다-이 기업이 단일 제품에 의존해 왔다는 점이다. 다른 기업이 더 나은 단말기를 개발하면 어떻게 될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이지만 블룸버그의 존재 자체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다. 한때는 블룸버그도 난공불락처럼 보이던 기존 기업을 무너뜨린 신생 기업이었다.
탁트인 블룸버그 본사 내에 깔끔히 정돈된 댄 닥토로프의 책상 옆으로 장난감이 하나 전시되어 있다(CEO도 개인 사무실이 없다). 태양계를 나타내는 플라스틱 모델로, 색칠된 작은 행성 하나가 거대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 태양 위로는 두 개의 평면 스크린과 함께 작은 아이콘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블룸버그 단말기의 미니어처다. 닥토로프는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블룸버그를 새로운 사업 영역으로 이끌었다(작은 행성들에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단말기는 여전히 블룸버그라는 우주의 중심에 놓여 있다. 닥토로프는 단말기를 “생명의 근원(the giver of life)”이라 칭한다. 그는 단말기에 경의를 표해야 하는 것쯤은 아는 영리한 인물이다.
닥토로프(55)에겐 정치 경험이 있다. 하버드와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그는 사모펀드 오크 힐 캐피털 Oak Hill Capital을 운영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이후 6년간 마이크 아래에서 뉴욕 부시장을 지냈다. 그는 9.11 테러 후 뉴욕을 재건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으나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20세기 뉴욕을 디자인한 건축거장 로버트 모세스 Robert Moses와 많은 비교를 당했다.
곱슬머리에 키가 크고 상당한 매력을 지닌 닥토로프는 매트릭스에 대단히 열성적이다. 그는 지난 분기에 자신이 몇 차례 회의를 열었는지-무려 727회에 달한다-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이크와 수없이 이야기를 나눴던 부시장 시절에는 블룸버그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마이크는 그에게 회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닥토로프가 블룸버그를 운영하기 위해 떠나던 날, 마이크는 그에게 “회사를 제발 말아먹지는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블룸버그의 탄생 비화는 꽤나 유명하다. 샐러먼 브라더스 Salomon Brothers에서 트레이더 및 IT 최고 책임자로 근무했던 마이크는 1981년 해고통지서를 받았다. 이후 퇴직금 1,000만 달러를 자본금으로 해 세쿤다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과 함께 채권 데이터를 분석하고 보고하는 기계를 개발했다. 그리고 수 년에 걸쳐 주식, 원자재, 에너지, 옵션, 부동산, 통화 등 광범위한 투자상품에 대한 방대한 정보 및 분석 도구를 추가했다. 블룸버그가 처음 설립됐을 땐 확고히 자리잡고 있던 기존 기업들에 비할 바가 안됐다. 하지만 1996년에 업계 2위 자리에 오를 만큼 급성장 페달을 밟았다.
블룸버그의 성공은 오직 엄청난 제품 하나에 기인한 것이다. 과거에는 데스크톱 터미널을 통해 트레이더들에게 정보가 제공됐기 때문에 이 단말기는 여전히 ‘터미널’(혹은 ‘블룸버그’)이라고 불리고 있다. 명칭은 그대로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31만 8,000명의 고객들에게 정보가 제공된다. 투박한 모습의 이 단말기는 여전히 1980년대식 ‘명령어 구동형(command-driven) 인터페이스’를 고수하고 있어, 사용법을 익히는 것이 까다롭다. 하지만 작동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1만 5,000개에 달하는 기능이 SEC 파일링 *역주: 미국증권거래위원회에 서류를 제출하는 것, 골프점수 계산, 별자리 정보까지 방대한 영역을 다루고 있다(2010년 분석결과에 따르면 고객들은 평균 29개의 기능만을 사용한다).
단말기 한 대 사용료는 연간 2만 4,000달러다. 2대 이상 사용하는 경우 대당 2만 1,000달러를 지불해야 한다. 수천 대를 사용하는 대형 고객들에게도 더 이상의 추가 할인은 없다. 경쟁업체들-(크게 뒤처진) 톰슨 로이터나 S&P 캐피털 IQ-과는 달리 블룸버그는 단 한 번도 특별할인을 한 적이 없다.
블룸버그는 자사의 단말기가 돈을 버는 아름다운 음악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라며, 지위의 상징성을 높이 추켜세웠다. 단말기가 처음 출시된 1991년에는 이메일 계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 드물 때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단말기는 고객들이 서로 전자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월가라는 배타적 소셜 네트워크에 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 것이다. 때문에 이 단말기는 더욱 더 많은 인기를 끌었다.
마이크가 경영자로 있던 시절 블룸버그는 거침없이 몰아붙이는 마초적인 판매 문화로 성공을 거듭했다. 단말기가 팔릴 때마다 벨이 울렸다. 근무시간이 길었지만, 그만큼 급여와 혜택이 풍부했다. 마이크에겐 충성도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블룸버그는 결코 직원을 해고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경쟁사로 이직을 한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마이크의 눈에 비친 그들은 ‘아이들의 입에서 음식을 뺏어가려는 배신자’였다.
블룸버그의 서비스 패키지 중 일부는 트레이더들에게 돈이 될 만한 시장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처음 마이크는 다우존스 보도자료 사용권을 획득했다. 다우존스는 당시 최대 데이터 제공업체였던 텔러레이트 Telerate의 모기업이었다. 마이크는 최대 라이벌 기업이 갑자기 서비스 제공을 중단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결국 1980년대 말 그는 뉴스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심했다.
단말기와 맷 윙클러는 천생연분이었다. 그는 “블룸버그 단말기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디테일과 숫자에 집착하는 그는 데이터를 끊임없이 다각도로 분석했다. 그런데 더 주목할만한 점은 윙클러가 마치 컴퓨터처럼 이분법적 사고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는 규정을 만들고 이를 영속 시키기를 원했지만, 일단 규정을 어긴 경우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철저히 무시했다. 심지어 직원들을 로봇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아마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인상도 주었다.
윙클러(58)는 불 같은 성격과 보타이를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언론계에서 ‘무서운 어른(adult terrible)’ *역주: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과 대조되는 의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가족은 3대째 월가에서 일했다. 할아버지는 종합 증권회사를 설립했고, 아버지는 증권 중개인이었다. 1990년 블룸버그가 금융 뉴스 서비스를 시작하기 위해 그를 영입했을 때, 당시 34세였던 그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채권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윙클러의 업적은 괄목할 만큼 상당하다. 그는 블룸버그를 월스트리트 저널과 맞먹는 언론사로 키웠다. 현재 전 세계 73개국 150개 지사에서 2,400명(총 직원은 1만 5,500명)의 기자를 거느린 블룸버그는 로이터와 AP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세계 3대 언론사다. 하지만 블룸버그 뉴스는 근본적으로 다른 미디어 기업들과 다르다. 블룸버그 뉴스의 설립 목적은 수익창출이 아니라, 단말기 대여고객들의 투자수익 목표를 증대시켜 더 많은 단말기를 판매하는 것이다(고객 평균 수입 43만8,000달러).
이 임무를 맡고 있는 윙클러는 직원들에게 ‘가장 큰 모험을 하는 이들을 위해 글을 쓰라’고 말한다. 2012년 블룸버그 뉴스에서 퇴사한 빌 매퀼런 Bill McQuillen은 이에 대해 “내 일은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도록 돕는 것이었다”고 조금은 다르게 설명했다.
물론, 어느 미디어 기업이든 비즈니스와 저널리즘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 블룸버그 뉴스의 특이한 점은 애초부터 이 둘이 동맹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마이크의 자서전 ‘블룸버그가 쓴 블룸버그(Bloomberg by Bloomberg)’-윙클러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는 내용이 책 표지에 있다-를 보면, 그는 윙클러 입사 첫 날 블룸버그 뉴스의 역할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마이크는 “우리 목표는 단순히 뉴스를 취재하고 보도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모든 뉴스에 블룸버그 단말기의 능력을 강조하면서 단말기의 분석 및 계산 능력을 윤리적으로 광고하는 것이다. 그러면 더 좋은 기사를 쓸 수 있고 동시에 더 많은 단말기를 대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부분 언론사들은 기자들과 판매업무를 관련 짓지 않는다. 하지만 블룸버그에서 이 둘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다. 블룸버그에서 부서장들은 매주 고객을 방문해야 하며, 기자들은 정기적으로 판매전화를 돌려야 한다. 윙클러는 이 시스템을 만들어 23년간 실행해 왔다.
윙클러는 자신이 쓴 376페이지짜리 가이드 북 ‘블룸버그 방식(The Bloomberg Way)’에 자신의 철학을 상세히 설명해 놓았다. 이 책에는 4단락짜리 서두의 구성요소(소네트 sonnet *역주: 10개의 음절로 구성되는 시행 14개가 일정한 운율로 이어지는 14행시와 교향곡의 규칙처럼 절대 불변의 구조다)부터 보도자료 재가공(금융 언론사의 주요 수입원)까지 모든 규칙들이 포함되어 있다. 윙클러는 “주관적인 판단은 지양해야 한다”며 기자의 의견이 반영된 글을 경멸한다. 그는 ‘부정확한(imprecise)’ 같은 형용사나 부사, ‘그러나(but)’ 같은 단어나 문장의 사용을 금지했다. ‘그러나’는 모순되는 아이디어를 동시에 처리하는 것이기에 독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윙클러는 기사 제목에 대해 독특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제목은 언제나 놀라움을 자아내야 하기 때문에 ‘기존에 보지 못했던 단어의 조합’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블룸버그에서는 아직도 윙클러가 직접 기사제목을 정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미즈호 Mizuho의 70억 달러 손실, 미국산 유해 땅 돼지를 깨우다’ 같은 헤드라인은 텀블러 Tumblr 블로그에 ‘이상한 블룸버그식 헤드라인’이라는 제목의 글이 쏟아지게 만들기도 했다.
윙클러는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의 왕국을 감시한다(4시에 기상해 하루 평균 150개의 기사를 읽는다). 성경을 손에 쥐고 맹렬한 설교를 쏟아내는 전도사처럼 ‘블룸버그 방식’을 휘두르고 다닌다. 전화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주간 내부 뉴스레터 ‘맷의 노트’에서나 아주 사소한 규정이라도 어긴 이들이 있다면 맹렬히 비판한다. 그는 한밤중에 기자들에게 전화를 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경쟁사의 특종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혹은 기사가 왜 (사소해서 찾아내기도 힘든) 규정을 어겼는지 묻는다. “왜 여기에 이 형용사가 있나?”
윙클러의 붙 같은 성격은 오랫동안 블룸버그의 ‘산업재해(occupational hazard)’로 여겨졌다. 일부 기자들은 그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를 질러대는 것을 ‘발작’에 비유하기도 한다. 물론 심각한 문제 때문에 화가 났을 수도 있다. 실제로 윙클러는 예리하게 기사의 허점을 찾아낸다. 하지만 사소한 일에 폭발할 때도 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어쩌면 그렇게 멍청한가?”라고 소리치며 수치심을 줄 때도 많다.
악명 높은 그의 성미 때문에 가십사이트 거커 Gawker에 윙클러 전담 페이지가 있을 정도다. 이곳에는 윙클러가 여성 에디터에게 소리치는 것이 녹음된 파일이 있다. 여성 에디터는 윙클러에게 “그날 실수는 컴퓨터 때문이었다”며 윙클러가 해고한 기자의 실수를 옹호하려 했다. 이에 격노한 윙클러는 “아니야! 컴퓨터는 아무 잘못이 없어! 문제는 컴퓨터가 아니야 그 인간이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2008년 퇴사한 전 블룸버그 홍콩지사 에디터 토니 스페스 Tony Spaeth는 블룸버그 기자들은 ‘어린애 취급’을 당한다고 말한다. “두 손을 발목에다가 묶어 둔 느낌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직원들마저 윙클러의 격노라는 ‘이상한 공포’ 속에서 근무를 했다고 설명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그런 학대를 견딘다. 하지만 이따금씩 반란과 저항의 신호들이 존재했다. 런던지사의 한 기자는 1994년 해고를 당한 뒤, 한밤중 텅 빈 뉴스실에 몰래 들어가 단말기에 ‘윙클러 왕재수(Winkler Wanker), 윙클러 왕재수’라는 내용의 적색 헤드라인을 띄우기도 했다. 블룸버그는 영국의 컴퓨터 남용법을 근거로 그 직원을 고소했다(윙클러의 두 아들도 일종의 반란을 일으켰다. 둘은 세속적 유대교를 저버리고 정통 유대교를 택했고, 중매인을 통해 아내를 만났다. 첫째 아들 제이콥 맥스 윙클러 Jacob Max Winkler는 ‘glorytothehighest.com’이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자칭 ‘가장 큰 모험을 하는 이들을 위한 주술사이자 영적 조언자’이다).
장시간의 인터뷰 동안 윙클러는 많은 직원들이 블룸버그에서 오랜 기간 만족스럽게 일하고 있는 사실을 들며, 그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묘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하루 뒤 그는 필자에게 이메일을 한 통 보내 “내가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없고, 당신은 나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을 언제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뉴스에 열정적이었을 뿐이다. 물론,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과정에서 냉정함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말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윙클러가 격노할 때면 뉴스 실에는 ‘보타이가 돌고 있다(the bow tie is spinning)’ 같은 암호가 퍼진다. 이런 암호는 더욱 공식적인 조기경보 및 진정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닥토로프를 포함한 고위 간부들은 윙클러의 화가 폭발하는 사태를 막아왔다. 전직 인사 책임자 멀린다 울프 Melinda Wolfe는 “윙클러의 일진이 좋지 않은 날이면 마음을 가다듬고 그가 홀로 떨어져 있는지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난해 9월 블룸버그에서 퇴사해 출판업체 피어슨 Pearson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당시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누가 (맷이 화를 낼까) 걱정하고 있거나, 맷이 흥분한 것처럼 보일 때면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댄이 맷과 많은 얘기를 나눴고, 덕분에 맷의 욱하는 성격도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맷의 상태가 호전된 이유는 스스로의 노력 때문만이 아니라, 주변에 그의 안정을 돕는 충분한 재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블룸버그 뉴스에선 무엇이든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마이크가 구상했던 것처럼 블룸버그 뉴스의 예산은 단말기의 판매성장과 함께 크게 증가했다. 출판 언론사들이 직원을 감축할 때 블룸버그는 계속 직원을 채용했고, 특히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 타임스 출신의 유명 언론인들을 스카우트했다. 이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2009년경 경영진은 블룸버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윙클러는 스포츠, 문화, IT기기 등 비금융 부문까지 보도 영역을 확대했다. 블룸버그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퓰리처상 같은 상을 수상하겠다’는 결심으로 장기간에 걸친 탐사보도에 착수했다. 하지만 윙클러는 아직도 퓰리처상을 손에 넣지 못했다.
하지만 기자들이 견뎌야 했던 절망적인 현실은 따로 있었다. 대형 글로벌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기사를 읽는 독자가 얼마 없다는 점이었다. 2009년까지 4년간 국무부 전담기자였던 재닌 자카리아 Janine Zacharia는 “기사 조회수가 7회밖에 되지 않아 슬픈 날도 있었다”고 말했다.
블룸버그 뉴스의 주력분야는 빠르고 실행에 도움이 되는 시장 뉴스였다. 즉, 순간순간에 독자들의 거래에 도움되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매일 발송하는 5,000건의 급보 가운데 대다수는 언론사 보도, SEC 파일링, 정부 발표 등의 속사포 같은 요약문이다. 이 중 일부는 인력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기사나 보도자료에서 세부사항을 발췌해내는 컴퓨터 알고리즘을 통해 자동적으로 생성된다). 블룸버그의 ‘속보 데스크’를 담당하는 역동적인 전문가들(사람)은 ‘속보’를 더 신속히 생산해 낸다. 이 시스템을 구축한 수석 에디터 케빈 레이널즈 Kevin Reynolds는 “가장 빠른 경우 자료를 받은 지 4.5초 만에 헤드라인이 작성된다”고 설명한다.
레이널즈는 2010년 시장 뉴스를 몇 개의 중요항목으로 요약해주는 퍼스트 워드 First Word를 선보이며 성미가 급한 트레이더들이 모든 기사를 읽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어 주었다. 이런 타입의 뉴스는 블룸버그 뉴스 전체 페이지 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2008년 1월 댄 닥토로프가 블룸버그에 입성했을 때만 해도 그는 다분히 보스적 기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블룸버그처럼 마찰이 잦은 기업문화에선 어떤 리더도-특히 새로 부임한 리더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곳은 더 많은 협력이 필요하다. 더 신속한 일 처리를 위해 많은 타 그룹 사람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닥토로프도 특정 그룹이나 인물들은 무척 상대하기가 까다롭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부임 초기 그는 매킨지 McKinsey의 컨설턴트를 고용하고, 300명의 직원과 200명의 고객을 만나며 데이터 수집에 열을 올렸다. 그는 블룸버그를 합리적 현대적 기업으로 만들고, 수입원 다각화를 위해 단말기 외의 새로운 사업들을 시작하려 했다.
2008년 7월, 닥토로프는 블룸버그의 더 큰 도약을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닥토로프는 사내 행사-코미디쇼와 비틀즈의 ‘레볼루션 Revolution’을 연주하는 악단으로 꾸며졌다-에 앞서, 47개의 구상을 담은 ‘플랜B’를 발표했다. 블룸버그를 다수의 사업부문으로 나누고, 각 부문에 개별 책임자와 판매부서를 갖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고 경영진 42명의 업무를 재조정하고, 공식적인 전략수립 프로세스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닥토로프는 대규모 기업인수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계획의 대부분은 창업자의 견해를 ‘복음(gospel)’처럼 여기는 블룸버그에서는 ‘변절(apostasy)’과 맞먹는 행위였다. 전직 최고인사책임자 울프는 “그곳 사람들은 마이크의 그늘 아래서 산다. 그들은 계속 ‘마이크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자문한다”고 말했다. 마이크는 항상 통합된 단일 기업을 추구해 왔다. 마이크는 전략수립 프로세스, 사업다각화, 인수합병 등을 좋아하지 않았다. 컨설턴트들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1998년 인터뷰에서 “일반적으로 컨설턴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똑똑하지 않다”고 말했다.
닥토로프는 자신의 계획에 솔깃한 조건을 내걸었다. 당시 61억 달러였던 매출을 2013년까지 100억 달러로 끌어올리면 회사 모든 임·직원들에게 연봉의 70%에 해당하는 보너스를 준다는 것이었다.
이는 무모할 정도로 야심 찬 계획이었다. 월가 붕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타이밍도 최악이었다. 2009년 블룸버그는 기업 역사상 최초로 전년 대비 단말기 대여 수 감소를 겪었다. 대폭적인 가격 인상으로 매출은 계속 증가했지만 100억 달러 목표달성은 요원해 보였다.
그러나 닥토로프의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기존 사업은 개혁하고 다른 신규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그는 “우리 전략의 축은 경기주기와 반대로 투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부임한 이후 블룸버그의 직원 수는 50% 이상 증가했다.
공식적으로 블룸버그를 이끄는 리더는 닥토로프였다. 마이크는 뉴욕시 윤리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블룸버그의 일상 업무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경영권에 심대한 영향을 주는 중대한 결정에만 관여할 수 있도록 개입이 제한되었다. 마이크는 지난해 11월 기자회견에서 “회사와 관련된 어떠한 일에도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마이크는 자신이 한 말보다 훨씬 깊숙이 회사 운영에 개입해왔다. 시청에서 단말기를 통해 회사를 모니터링했고, 매주 닥토로프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때로는 영업시간 이후 회의참석을 위해 본사에 나타나기도 했다. 심지어 뉴욕시가 ‘스노우포칼립스(snowpocalypse)’ *역주: 눈(snow)과 종말(apocalypse)의 합성어로 알려진 최악의 눈사태를 겪던 1주 동안에도 두 번이나 본사에 들렀다(당시 참석했던 회의 중 하나가 블룸버그 웹사이트 개편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때에는 시청에서 직접 브리핑을 받았다. 마이크는 회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꿰고 있었지만, 시장이 된 이후 자신이 책임자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수 많은 내부 갈등이 일어났을 때도 모호한 조연 역할만 했다.
초기 닥토로프는 타임과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최고 에디터로 일했던 펄스틴을 최고콘텐츠책임자(Chief Content Officer)로 영입해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했다. 덕분에 블룸버그는 윙클러의 대안이 될 믿을만한 수석 에디터를 얻게 되었다. 자신의 업무방식이 존중 받기를 갈망하던 윙클러는 월스트리트 저널 출신 수석 에디터(월스트리트 시절 자신을 채용한 주인공)가 블룸버그로 오게 됐다는 사실의 상징성을 음미했다.
펄스틴이 블룸버그로 오게 되면서 윙클러가 물러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문이 무성해졌다. 플랜B에 따라 윙클러는 이미 블룸버그의 TV, 라디오, 인터넷 부문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두 달 뒤 윙클러는 일일 뉴스미팅과 기사 편집에서 물러나 ‘큰 그림’을 그리는 일과 직원 교육에 집중하겠다고 발표했다. 월간지 베니티 페어 Vanity Fair의 2008년 12월호에 실린 한 기사에서 윙클러는 사망선고를 받은 사형수, 펄스틴은 전도 유망한 인물처럼 묘사되기도 했다. 그 기사는 ‘윙클러가 자신이 만든 걸작에서 쫓겨날 것처럼 보인다’고 예견했다.
하지만 2009년 5월의 한 주말, 상황은 완전히 반전됐다. 마이크 블룸버그와 윙클러는 함께 워싱턴 백악관 기자 만찬에 참석했다. 그곳에 참석했던 이들은 마이크가 윙클러에게 그를 믿는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아무도 윙클러를 쫓아내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윙클러는 이에 대해 “어떤 백악관 기자만찬에서도 블룸버그 내 인물의 역할에 대해 마이크와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당시 블룸버그 백악관 담당기자 에드 첸 Ed Chen은 “윙클러는 뒤로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나아갔다”고 말했다. 그렇게 윙클러의 ‘실각설’은 일단락됐다.
더 이상 윙클러의 잠재적 대체자로 비치지 않게 된 펄스틴은 점차 윙클러가 남기고 간 갈등을 수습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일부 사람들은 그를 “속삭이는 맷”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무렵 마이크는 회사 수익성을 견고히 하려는 닥토로프의 계획에 ‘폭탄’을 투하하는 결정을 내렸다. 비즈니스위크를 인수하기로 한 것이다. 닥토로프, 피터 그로어 Peter Grauer 회장, 펄스틴은 하나같이 그 결정에 반대했다. 그들은 2009년 손실이 6,200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비즈니스위크를 ‘돈 먹는 하마’(money pit)로 여겼다. 하지만 마이크는 매주 90만 부를 발간하는 이 잡지사를 인수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했다. 인수가격이 500만 달러라면 밑져야 본전 아닌가? 블룸버그는 역동적인 젊은 에디터 조시 타이런기엘 Josh Tyrangiel을 영입해 진두지휘를 맡겼다. 비즈니스위크는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라는 새 이름 아래, 전보다 뛰어난 퀄리티의 역동적인 잡지로 부상했다. 그럼에도 이후 1년 동안 3,000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2011년 마이크는 자신의 목소리를 키우기 위한 두 번째 사업을 시작했다. 사설이나 유명 칼럼니스트의 글을 실은 온라인 오피니언 페이지 블룸버그 뷰 Bloomberg View가 그것이다. 그는 ‘백지수표(open checkbook)’를 앞세워 마이클 루이스 Michael Lewis와 제프리 골드버그 Jeffrey Goldberg 등 많은 유명 논객들을 끌어 모았다. 최근 퇴사한 마이클 킨슬리 Michael Kinsley는 블룸버그 재직 당시, 현재 일하고 있는 뉴 리퍼블릭 New Republic에서 받는 연봉의 두 배를 받았었다고 밝혔다. “그건 아마 저널리스트가 절정의 전성기 때에만 누릴 수 있는 금액일 것이다.”
닥토로프의 사업개편 과정에서 첫 번째 대상은 당연히 2008년에만 1억 9,600억 달러의 손실을 기록한 TV사업이었다. 당시 방송 화면은 주식시세 표시와 인포박스 info-box들로 어수선했고, 프로그램들은 자랑스레 C-SPAN *역주: 미국의 비영리 케이블TV 공중 통신망 로고를 달고 있었다. 블룸버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6개의 다른 언어로 채널을 운영했다. 물론 시청률은 저조했다. 블룸버그는 이런 손실을 ‘단말기를 홍보하고 뉴스에 대한 접근성을 높인다’며 정당화했다.
전 NBC 뉴스 사장 앤디 랙 Andy Lack은 “그것은 합리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랙은 2008년 블룸버그의 멀티미디어 사업부문을 개선하기 위해 닥토로프가 영입한 주요 인물이었다. 그는 “비용이 터무니 없이 높았고, 거기에 비하면 매출은 거의 전무했다. 영향력 증대나 제품 퀄리티 제고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사업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붓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미디어 부문 개편을 꾀하던 랙은 ‘신경 쓰지마(None of Your Business)’라는 저녁 코미디 프로그램 론칭을 고려했다. 2010년 여름 데일리 쇼 Daily Show의 한 공동 제작자는 전 미스 USA와 이반 Ivan이라는 주식 컨설턴트를 공동진행자로 내세워 22분 길이의 파일럿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하지만 랙은 곧 이 프로를 중단시켰다.
2009년 그는 외국어 채널들을 종료했고, 블룸버그 역사상 최초로 140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또 국내 채널을 운영하기 위해 폭스 뉴스의 젊은 이사 데이비드 로즈 David Rhodes를 영입했다. 얼마 안 가 블룸버그 TV는 새로운 진행자, 더 나은 화면, 새로운 프로그램들로 훨씬 더 볼만한 채널이 되었다. 그러나 블룸버그 TV부문은 곧 윙클러의 규칙을 어겼다. 윙클러는 더 이상 TV부문 공식 책임자가 아니었지만, 그 역할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윙클러는 TV부문 개선 과정에서 새로운 TV 매니저들에게 블룸버그 방식을 위반했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비판의 범위는 게스트 선정부터 자막 구두법까지 광범위했다.
2010년 중반 윙클러는 ‘맷의 노트’를 통해 블룸버그 TV를 맹비난했다. 그는 “독자, 청취자, 시청자들이 블룸버그 뉴스에 원하는 것은 팩트이지 가십이나 의미 없는 뻔한 이야기들이 아니다. 티저 영상에서 일본 정치인 칸 나오토 Naoto Kan를 ‘칸 더 맨 Kan the Man’이라고 칭했던 것은 유치하고, 모호하고, 유익하지 않은 방식이었다. 블룸버그 TV 프로듀서들은 골드만삭스 의회 청문회에서 실시간 트윗을 올려 우리의 ‘진정성’을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CEO 로이드 블랭크페인 Lloyd Blankfein이 머리를 조아리지 않기 위해 열심이었다’라는 내용의 트윗에 대해 “그것은 비난이며 사견이기 때문에 부정확한 것이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로즈는 2년간 윙클러의 간섭에 시달린 후 2011년 CBS 사장직을 맡기 위해 퇴사했다. 이후 로즈의 후임자도 블룸버그를 떠났다.
블룸버그 TV부문은 여전히 연간 1억 달러의 손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가망 없는 시청률 경쟁을 포기하고 블룸버그 웹사이트, 태블릿, 스마트폰용 디지털 비디오 제작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애틀랜틱 미디어 Atlantic Media에서 영입한 저스틴 스미스 Justin Smith다. 회장을 만나러 가는 길에 포춘과 우연히 마주친 랙은 TV에 관해서는 이제 말도 꺼내기 싫다고 했다. “우리의 미래는 그런 플랫폼들(웹사이트와 태블릿 등)에 달려 있다.”
블룸버그를 변화시키려는 닥토로프는 종종 공동 설립자이자 단말기 사업 책임자인 톰 세쿤다의 저항에 부딪혔다. 세쿤다는 자신의 영역과 블룸버그의 오랜 방식을 지키는 데 윙클러만큼이나 강경한 인물이다. 많은 이들은 수학을 전공한, 무뚝뚝한 세쿤다(59)를 단말기 사업을 이끄는 ‘정신 나간 천재’ 혹은 ‘기술과 금융을 결합시킨 마법사’로 생각했다. 포브스에 따르면, 세쿤다의 자산은 15억 달러에 달하는데 대부분 블룸버그 지분이다.
세쿤다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단말기와 경쟁을 하거나 단말기 매출에 감소를 가져올 수 있는 모든 것에 반대하고 있다. 또 사업다각화에도 반대한다. 그는 “나는 반대 입장이다. 단말기의 잠재 고객은 100만에서 200만 명에 달하며, 우리는 그들이 누군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세쿤다는 자신과 단말기를 동일시하여 때론 1인칭 시점으로 단말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컨대 “나 스스로가 더 좋은 제품이 되기 위해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다. 내 제품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사람들이 나를 사게 만들 것이다”라고 말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블룸버그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전통적 비즈니스 모델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것도 허락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노력의 시초는 블룸버그 로 Bloomberg Law(이하 사내에서 불리는 것처럼 BLAW) 사업 때 나왔다. 이 사업의 취지는 단말기 서비스를 월가 트레이더들뿐만 아니라 법조인들에게도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톰슨 로이터가 소유한 웨스트로 Westlaw와 리드 엘제비어 Reed Elsevier의 사업부인 렉시스넥시스 LexisNexis 두 업체가 법률정보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업체는 법률, 판례, 사건 일람표, 법률 조항 등 수십 년간 축적한 데이터베이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에 필적하기란 대단히 어렵고 많은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에 블룸버그보다 적합한 기업이 어디 있겠는가? 마이크는 2002년 시장직 수행을 위해 회사를 떠나기 전부터 이 계획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의 후임자는 어떤 정보든 기존과 다르게 더 저렴한 플랫폼에서 제공된다면 블룸버그의 효자상품(단말기)의 희귀성과 상품가치에 타격을 입힐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래서 BLAW를 단말기 임대 서비스의 일환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블룸버그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새로운 법률 데이터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월가(금융) 데이터 서비스 사용료로 1만 8,000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대부분의 로펌들은 이런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웨스트로와 렉시스의 가격정책이 로펌들에게 더욱 매력적이었다. 이들은 로펌 고객들에게 비용전가를 쉽게 하기 위해 검색을 할 때마다 사용료를 부과하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BLAW의 데뷔는 실패로 끝났다. 2006년 블룸버그는 전 세계에 판매 팀을 꾸렸고, 로펌에 3,000대의 단말기를 판매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당시 이 프로젝트에 관여했던 한 인물은 판매대수가 고작 300대에 그쳤다고 말했다.
2008년 닥토로프가 입사했을 당시, 그는 BLAW를 블룸버그 역사상 최초로 독립적인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 전략에 대한 고위 간부들간의 논쟁이 몇 년간 이어졌다. 그래서 매킨지에 가격 책정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세쿤다는 블룸버그가 틈새 공략이 아니라,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신규시장에 진입하려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당신들은 바닷물을 끓이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블룸버그는 실패를 거듭했다. 최초 BLAW 웹사이트는 플래시 Flash 소프트웨어 플랫폼으로 제작됐는데, 컴퓨터의 잦은 다운을 유발하고 모바일 기기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웹사이트를 새로운 플랫폼에서 재구축해야 했다. 변호사들이 비밀번호를 공유하는 것을 우려해 단말기와 마찬가지로 BLAW에서도 지문인식 기능을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변호사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세쿤다는 브랜드 가치의 훼손을 막기 위해선 블룸버그 이름을 달고 판매되는 모든 것이 ‘프리미엄’ 정액요금제 상품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BLAW 신규 웹사이트의 사용료(연 5,400달러)는 단말기에 비해선 훨씬 저렴했지만 경쟁사에 비해선 비싼 편이었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많은 기업들이 할인을 받았다.
2009년 BLAW 웹사이트 개설 당시, 블룸버그는 3,000명의 고객유치를 목표로 했지만 다시 한번 실패를 맛보았다. 이번에는 1,000명에 그쳤다. 현재 BLAW는 약 2,000만 달러의 연 매출을 올리고 있다. 2010년 초부터 3명의 인물이 BLAW의 CEO를 맡아왔다. 지난 10년간 블룸버그는 BLAW 때문에 약 10억 달러의 손실을 보았다. 회사 내부 인물 중 일부는 BLAW를 ‘블룸버그의 베트남’이라고 부르고 있다.
2011년 9월 닥토로프는 자신의 계획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비즈니스, 법률, 정부 등에 특화된 전문 정보업체 BNA(Bereau of National Affairs)를 9억 9,200만 달러에 인수하기로 했다. 인수를 결정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BLAW 사업의 가속화였다. 닥토로프는 지난해 BLAW와 BNA의 합병계획을 발표했다. 그 과정에서 80명이 해고될 전망이다. 한편으로 BLAW는 아직 렉시스와 웨스트로에 한참 뒤지지만 시장 점유율을 꽤나 확보해왔다. 닥토로프에 따르면, 현재 BLAW의 실적은 블룸버그의 최신 전망치에 ‘약간’ 모자란 정도다.
그럼에도 BLAW가 수익을 창출하려면 꽤나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그로어는 “우리 회사의 매력은 근본적으로 주주가 한 명인 비상장 기업으로 수익창출이 다소 더디더라도 관대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양한 기회를 매우 장기적으로 관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장기적이라면 과연 얼마만큼일까? 그는 “우리 기준에서는 10~15년이다”라고 덧붙였다.
BLAW가 부진을 겪고 있음에도, 닥토로프는 단말기의 성공을 모방한 두 번째 야심 찬 시도를 준비하고 있다. BGOV로 알려진 블룸버그 거버먼트 Bloomberg Government다. BGOV는 정부와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뉴스와 정보를 제공한다는 취지의 사업이다. 동시에 블룸버그 단말기와는 거리를 유지해 BLAW가 겪었던 문제들을 반복하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다.
BGOV는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발 빠른 신생기업으로 구상된 것이다. 책임자는 매킨지 파트너 출신인 크리스 월터스 Chris Walters로 닥토로프의 내부 전략 책임자다. 월가가 아닌 정부에 주력하기 때문에 BGOV 본사는 뉴욕이 아닌 워싱턴에 위치해 있다. 단말기 대신 자체 웹사이트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며, 이메일과 고객 관리 시스템도 자체 운영하고 있다. BGOV는 (블룸버그 뉴스와는 별개로) 기사 및 리포트를 작성하고, 자료를 분석할 150명의 저널리스트와 정책 전문가들을 채용할 계획이었다.
연 사용료를 5,700달러로 책정한 BGOV는 컨그레셔널 쿼터리 Congressional Quarterly나 내셔널 저널 National Journal 등 확고히 자리잡고 있는 기존 업체들에 도전하기 위해, 처음 18달 동안 1억 달러를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블룸버그의 자신감과 BGOV에 대한 막대한 투자 덕분에 지역잡지 워싱터니안 Washingtonian은 BGOV를 ‘블룸버그의 죽음의 별’ *역주: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비밀병기로 다른 행성을 파괴할 때 쓰인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BGOV는 곧 윙클러와 부딪쳤다. 그는 기자들을 포함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사업을 지지하지 않으려고 했다. 기자들에게 월급을 주는 것은 BGOV였는데도 말이다. 윙클러는 블룸버그 뉴스가 모든 인사채용을 승인해야 하며, 모든 기자들은 자신 휘하의 뉴스 에디터들에게 직접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윙클러는 그 다음 BGOV의 콘텐츠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워싱턴의 독자들을 겨냥한) BGOV 기사들은 블룸버그 방식의 구조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윙클러는 2011년 1월 BGOV 론칭 이후 콘퍼런스 콜을 통해, 매일 오후 2시 ‘헤드라인 클리닉’을 열었다. 그는 뉴욕에서 전화를 걸어 BGOV 베테랑 에디터들의 헤드라인을 무자비하게 비판했고, 블룸버그 방식으로 재작성하라고 요구했다. 에디터들은 그저 인상을 쓰고 곁눈질을 할 뿐이었다. 당시 참석자 중 한 명은 “윙클러가 고함을 질러댔다. 새삼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익숙한 일 아닌가? 그는 심지어 ‘백서(white paper)’라는 일반적인 정책 용어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고 회고했다.
내부 비판가들은 월터스와 그의 보좌관을 ‘매킨지 보이’라고 조롱했다. 블룸버그 방식을 존중하지 않는 풋내기 컨설턴트라는 의미였다. 세쿤다는 BGOV 웹사이트가 예정대로 제대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엔지니어링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
2011년 말 기준으로 BGOV 사용자 수는 야심 찼던 목표치(5,400명)에 훨씬 못 미치는 2,000명 수준에 그쳤다. (윙클러와 세쿤다가 BGOV 사업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BGOV 경영진은 예산 회의에서 직접 두 사람에게 이에 대한 해명을 해야 했다. 50여 명의 사람들 앞에서 세쿤다는 월터스를 맹렬히 비난했다. “왜 그렇게 많은 돈을 거기에 쏟아부었나? 왜 작은 규모로 시작하지 않았나? 블룸버그도 처음에는 작은 규모로 시작했다!”
닥토로프가 불편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는 동안, 월터스는 2시간이나 세쿤다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는 자신의 전망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했고,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월터스는 저널리스트-이미 그는 윙클러에게 저널리스트 관리 권한을 넘겨줬다-를 임시해고하는 방식으로 BGOV 예산을 줄일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윙클러의 화를 돋울 뿐이었다. 폭발한 윙클러는 “우리는 정리해고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다! 어떻게 나와 상의도 없이 저널리스트들을 해고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만신창이가 된 월터스는 몇 달 후 퇴사해 일기예보 전문 웨더 채널사 Weather Channel Cos의 최고운영책임자로 부임했다. BGOV의 예산은 삭감됐다. 40명가량의 직원이 해고됐고, BGOV는 다시 뉴욕 본사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현재 BGOV의 사업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 사용자 수는 4,200명으로 2011년 최초 목표에는 여전히 못 미치고 있다. 닥토로프는 BGOV의 누적 손실을 ‘2억 달러 이하’로 추정한다. 이대로라면 BGOV는 2018년경에 손익분기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언제쯤 초기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BGOV가 이제 블룸버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2013년 ‘블룸버그 제국’을 흔들었던 스캔들은 이미 2년 전에 위험신호가 나타난 것이었다. 2011년 9월 15일 블룸버그는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낸 UBS의 ‘악당 트레이더’에 대한 뉴스로 떠들썩했다. 아침 7시 29분 블룸버그 TV 앵커 에릭 샤츠커 Erik Schatzker가 방송에 나와 블룸버그만의 특별한 강점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그 트레이더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우리만의 특별한 도구, 블룸버그 단말기를 이용해 왔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가 최근 로그인한 것을 봤을 때, 아마 UBS는 이 투자 손실을 최근에야 파악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의도치 않은 고백에도 외부인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아마 블룸버그 네트워크의 낮은 시청률 때문일 것이다). 샤츠커는 곧바로 그런 관행(고객의 단말기 사용정보를 보는 것)에 동참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밝힌 것 때문에 호된 질책을 받았다. 사실 그것은 블룸버그 방식의 일상적인 부분이었다. 블룸버그는 항상 기자들에게 데이터 접근권을 부여해 사용자들이 마지막으로 로그인을 한 게 언제이며, 주로 사용하는 단말기 기능은 무엇이고, 심지어 고객센터에서 나눴던 대화내용까지 알 수 있게 했다. 이것은 저널리스트들을 영업 파트너로 보는 오랜 판매 관행의 단면이었다. 블룸버그의 판매사원은 더 많은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고객의 단말기 사용내역을 보고, 고객들을 만나 이제껏 사용하지 않았던 매력적인 단말기 기능들에 대해 알려주기도 했다. 전직 고위 영업담당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고객정보는 어마어마했다”고 증언했다.
2011년 생방송 폭로사건 이후, 닥토로프는 고위 경영진 회의를 열었다. 그는 기자들이 고객 데이터에 접근하는 것을 당장 중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훗날 아무도 이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 문제는 2013년 봄 다시 한번 수면위로 떠올랐다. 홍콩지사의 한 기자가 곧 퇴사할 골드만삭스 파트너에 대한 특종을 좇고 있었다. 그 여기자는 4월 16일 골드만삭스의 지역 PR담당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했다. 직원이 퇴사여부 확인을 거부하자, 기자는 자신의 단말기를 보면 그가 2주 동안이나 단말기에 접속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고 말했다. 이 둘의 대화 내용은 곧장 맨해튼 골드만삭스 본사로 전달됐고, PR 책임자 제이크 시워트 Jake Siewert가 자신이 아는 블룸버그 기자들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또 그는 JP모건 체이스의 홍보 책임자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JP모건도 블룸버그 기자들로부터 유사한 예측성 질문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두 은행 모두 과도한 사용료를 비롯해 여러모로 블룸버그에 응어리 진 것이 많았다(골드만의 연간 단말기 사용료는 거의 1억 달러에 달한다). 4월 29일 골드만삭스와의 회의에서 닥토로프는 수년간 블룸버그 기자들이 고객 데이터에 접근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골드만삭스 회장 개리 콘 Gary Cohn에게 이미 그런 관행을 폐지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유익한 정보를 수집할 것을 약속했다. 닥토로프는 그렇게 이 일이 일단락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뉴욕 포스트는 11일 후 ‘골드만, 블룸버그 염탐꾼을 색출해 내다(Goldman Outs Bloomberg Snoops)’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다. 블룸버그 고객들은 격노했다. 그리고 고객 비밀 정보 중 기자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답변하기를 요구했다. 그렇게 블룸버그는 곤경에 빠졌다.
닥토로프는 피해 대책 모드에 돌입했다. 수백 명의 고객들과 연락을 취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정보(영업 비밀)는 보호돼 왔다는 점을 확신시켰다. 그는 블룸버그의 관행에 대해 두 차례나 감사를 의뢰했다. 첫 번째 감사는 외부 로펌과 컨설팅 기업이 주도했고, 주로 염탐행위에 대해 초점을 맞춰졌다. 감사는 ‘블룸버그가 현재 적절한 개인정보 통제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기자들은 거래와 포트폴리오, 메시지 데이터 등 민감한 정보에 대해서는 결코 접근권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102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는 닥토로프의 2011년 지시사항이 지켜지지 않은 원인을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했다. 하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이며, 고객 정보 침해 여부를 감독하는 담당자가 왜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었다.
닥토로프는 블룸버그 뉴스의 관행에 대한 감사를 한 차례 더 의뢰했다. 두 번째 감사는 윙클러의 사업방식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전직 뉴욕 타임스 옴부즈맨이자 블룸버그의 신망 받는 에디터 클라크 호이트 Clark Hoyt가 감사를 주도했다. 뉴욕 타임스에서는 감사 보고서가 실제로 인쇄돼 나오기 전까지는 교열 담당자 외에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반면, 블룸버그에서는 경영진이 제일 먼저 보고서를 받아보고 어떤 부분을 발표할지 검열했다.
두 번째 보고서는 블룸버그가 주목할 만한 다양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호이트는 블룸버그가 비즈니스와 저널리즘을 분리할 방법을 강구하기를 촉구했다. 또 윙클러 스타일의 헤드라인 논조를 비판하고, 윤리교육 강화도 역설했다. 블룸버그는 이런 권장사항들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블룸버그가 감사 보고서 ‘요약문’이라고 발표한 것의 톤은 호이트가 뉴욕 타임스에 발표했던 평가 보고서-구체적이면서 취약점까지 모두 포함했다-와 확연히 달랐다. 책임소재가 불분명했고, 주요 세부사항이 결여돼 있었다. 작은 문법 실수로 기자들을 맹비난하는 언론사가 고객을 염탐하게 만든 정책의 책임자도 밝히지 않았다.
어찌됐건 이 두 보고서는 블룸버그에 꽤나 좋을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한 차례 폭풍우가 지나가며 고객들의 분노는 가라 앉은 것처럼 보였다. 윙클러도 무사해 보였다. 블룸버그 웹사이트에 게재된 5월 12일자 칼럼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Holding Ourselves Accountable)’에서 윙클러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했지만 문제의 심각성을 최소화시켰다. 또 그 일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어떠한 책임을 질 것인지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계속 자신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회피했다. 그는 “그것(고객 데이터 접근)은 블룸버그 뉴스에서 허가되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 기능에 대한 허가는 뉴스 부문의 누군가가 내리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고 밝혔다. 윙클러는 인터뷰 말미에서야 스누핑에 대해 수년간 알고 있었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블룸버그의 저널리즘은 최근 불미스러운 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힘들게 취재한 중국 정부에 관한 연재 기사가 찬사를 받은 지 1년 만인) 지난달, 블룸버그 기자들은 익명으로 뉴욕 타임스에 윙클러가 중국 정부의 반응이 두려워 1년간 공을 들인 탐사보도 프로젝트를 갑작스레 취소했다고 제보했다. 윙클러는 공공연하게 프로젝트의 준비가 아직 미흡해 연기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해 왔다. 그러던 중 블룸버그 수석 에디터 2명이 중국 관련 탐사보도에 대해 “훌륭하다. 거의 거의 완성됐다”고 평가한 내부 이메일이 유출되어 언론에 보도됐다. 그 기사에 따르면, 윙클러는 자신의 결정을 나치시대 독일의 자체검열과 비교하며 이는 큰 충돌을 피해 중국에 대한 보도를 계속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블룸버그에선 단말기가 여전히 최우선이고, 저널리즘은 사업에 피해를 준다면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더욱 확고해졌다. 얼마 후 중국 프로젝트로 수상의 영광을 안았던, 수석 기자이자 이메일 유출의 용의자로 의심받았던 마이크 포사이스 Mike Forsythe가 갑작스레 퇴사해 블룸버그 출신 기자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전직 백악관 출입기자 딕 케일 Dick Keil은 페이스북에 “내 모교(블룸버그)가 부끄럽다”는 글을 올렸고, 다른 블룸버그 출신 기자들도 비슷한 감정을 표출했다.
한편 블룸버그 뉴스의 상하이, 베이징 지부는 지난해 11월 마지막 3일 동안 중국 정부 당국으로부터 예정에 없던 조사를 받았다. 최소 한 곳 이상의 당국이 중국 정부를 나치와 비교한 것에 대해 윙클러의 사과를 요구했다(블룸버그 대변인은 이에 대한 언급을 거절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블룸버그 뉴스 최초의 감원계획 발표와 맞물려 발생했다. 감원 규모는 35명으로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한계’가 없어 보이던 언론사에는 놀랄만한 일이었다. 해고의 칼날은 스포츠, 예술, 조사보도 부문으로 모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가 되기 위한 계획의 핵심요소들이었다. 블룸버그는 야심 찼던 목표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및 금융 언론사’로 하향 조정했다.
닥토로프는 부동산과 개인금융 웹사이트 등 이미 두 개의 사업을 접었다. 또 추가적으로 두 사업에서 손실을 줄일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인다. 바로 BGOV와 청정 에너지업계에 대한 데이터를 제공하는 블룸버그 뉴스 에너지 파이낸스 Bloomberg News Energy Finance다. 그는 둘 중 하나, 혹은 둘 모두를 BNA와 합병시키는 안을 검토 중이다.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상당한 규모의 정리해고가 뒤따를 전망이다.
사실 엄청난 투자와 갈등, 관심의 중심에 있던 사업부문들-TV, 뉴스, BGOV, BLAW-의 매출은 전체 매출의 5%에도 못 미친다. 지금까지 경쟁사들은 블룸버그의 패착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블룸버그는 지난 2년간 단말기 판매 성장이 1%로 정체됐음에도 가까스로 점유율을 늘려왔다. 그러나 블룸버그도 다른 기술기업과 같은 위험에 처해 있다. 고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저렴한 옵션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블룸버그의 위험은 8개의 주요 월가 기업들(고객사)이 협력해 블룸버그 단말기의 인기 인스턴트 메시지에 대응할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