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이미 430조 원을 돌파했고 수년 내 1000조 원대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기업이 운용 책임을 지는 확정급여(DB)형 퇴직연금의 고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현재 적립금의 93.2%가 원리금 보장 상품에 편중돼 분산투자가 매우 미흡하며 수익률 역시 시장 금리 수준에 머물러 제도 도입 20년이 지나도록 기업의 자산운용 노하우는 전혀 축적되지 못했다.
퇴직연금 자산운용은 자사의 운용 방침과 리스크 허용도에 맞춰 분산투자를 통해 목표수익률을 달성하는 것이 세계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DB형 자산운용은 과거 고금리 시대의 관습에 발목이 잡혀 멈춰 서 있다. 이를 개선하고자 적립금 운용 계획서 작성을 추진하고 최근에는 ‘기금형’ 도입 논의까지 이뤄지고 있다. 과연 기금형 도입이 자산운용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우리와 유사한 퇴직연금 제도를 운영하는 일본의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 DB형은 적립금 규모와 관계없이 국내외 주식·채권·대체투자 등으로 체계적인 분산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임의 제도인 일본은 약 1만 2000개 기업이 DB형(65조 엔)을 도입하고 있고 그중 계약형이 93.7%, 기금형이 6.3%를 차지한다. 다만 대기업이 주로 기금형을 도입하고 있어 적립금 규모는 기금형이 약간 더 크다.
중요한 점은 계약형이든 기금형이든 대부분의 기업이 ‘적립금 자산운용위원회’를 설치하고 합리적인 자산 배분을 통해 적립금을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 기업연금연합회에 따르면 제로금리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간 평균 수익률은 4.31%에 달했다. 특히 2023년에는 9.27%라는 높은 수익률을 달성했으며 계약형과 기금형의 수익률 차이도 크지 않다. 이러다 보니 대부분의 기업이 적립금 초과 상태다. 실례로 일본 최대 연금사업자인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SMTB)의 DB형 고객은 퇴직급여 채무에 비해 38%나 적립금 잉여 상태다.
일본 기업이 처음부터 분산투자를 해온 것은 아니다. 우리보다 40년 앞선 1960년대에 제도를 도입했으나 상품 규제로 인해 오랜 기간 원리금 보장 상품 중심으로 운영해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금융자유화 추진과 급격한 금리 하락, 상품 규제 완화가 이뤄지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에 맞춰 일본 정부는 합리적인 자산운용을 촉진하고자 상세한 적립금 운용 가이드라인을 2002년부터 도입했다. 가이드라인은 자산운용 담당자의 역할과 책임 명문화, 의사 결정 과정의 합리성과 투명성 확보, 운용 방침에 따른 분산투자를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하며 효율적인 자산운용을 유도했다. 나아가 자산운용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DB형 도입 기업의 자산운용 수익률을 공표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의 사례는 계약형과 기금형이라는 제도 유형 그 자체보다도 DB형 기업의 자산운용에 대한 역할과 책임, 의사 결정 과정의 합리성과 투명성 등 구체적인 운용 프로세스를 확립해 효율적인 자산운용을 촉진했다는 시사점을 제시한다. 우리 역시 제도 형태 논의를 넘어 기업이 근로자의 노후 자산을 책임감 있게 운용할 수 있도록 합리적이고 투명한 운용 프로세스를 시급히 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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