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업은행이 경영난을 겪고 있는 여천NCC 대주주가 제대로 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무역금융을 중단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비친 것으로 확인됐다. 구체적인 여신 거래를 예로 들면서 압박의 수위를 단계적으로 높여가고 있는 셈이다.
28일 금융계에 따르면 산은은 최근 여천NCC 공동 대주주인 DL케미칼과 한화솔루션을 겨냥해 “자금 지원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신규 무역금융 계약이 어려울 수 있다”는 취지의 의견을 전달했다.
여천NCC는 그동안 산은에서 약 1000억 원 규모의 무역금융을 이용해왔다. 6개월마다 신규 한도 계약을 체결하고 필요한 자금을 약정 한도 내에서 끌어오는 방식이다. 여천NCC는 만기 도래 시점에 맞춰 매번 신규 계약을 체결해 크레디트 라인(여신 제공 한도)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왔는데 이것이 끊기면 자금난이 커질 수 있다. 여천NCC는 이달 초 자금난을 겪다가 대주주들이 3000억 원을 긴급 대여해 부도를 가까스로 모면했던 만큼 앞으로도 자구 노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산은이 언제든 무역금융 중단 카드를 꺼낼 것으로 보인다. 산은의 한 관계자는 “현재 무역금융은 원활하게 제공하고 있다”면서도 “여천NCC 측에 자금난을 신속하게 해결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에서는 정부가 석유화학 업계에 대한 구조조정에 착수하면서 고강도 자구 노력을 요구하고 있어 산은의 압박 수위가 더 높아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산은의 10대 석유화학 업체에 대한 대출채권 잔액은 23일 기준 5조 7939억 원에 달한다. 이 중 1년 내 만기가 돌아오는 대출채권 규모만 1조 7156억 원이다. 만기 도래 시 대출 조건을 비슷하게 설정해 계약을 이어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대주주의 자구 노력이 미흡하면 산은이 여신을 지렛대 삼아 고통 분담을 추가로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산은이 석유화학 기업에 대한 은행권 대출 연장 등을 결정하는 자율협의체에 참여하는 점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협의체는 채권자의 75%(채권액 기준) 이상의 동의를 얻어 자금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석유화학 업계에 대한 은행권 전체 대출액(약 14조 원) 중 산은 몫이 40%가량인 만큼 금융 지원 과정에서 산은의 입김이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금융권 관계자는 “석화 기업 입장에서는 산은의 압박을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한편 이날 삼일PwC는 ‘일본 석유화학 구조조정 사례와 시사점’ 보고서에서 일본의 산업재생법 취지를 반영해 기업활력법(원샷법)을 실질 인센티브 중심으로 개편하고 세제 감면과 금융·보증 패키지, 현금성 인센티브를 포함한 ‘한국형 구조조정 패키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기간도 일본이 40년이 걸렸다면 한국은 2년 이내로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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