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제주에서 마무리된 한미 2차 관세 협상에서는 고정밀 디지털 지도 반출 등 미국 산업계가 꾸준히 문제 삼아온 비관세 장벽이 대거 의제로 반영됐다. 이는 한국이 자유무역협정(FTA) 덕에 제조업품 관세가 사실상 제로(0)에 수렴하고 투자도 비교적 자유로워 미국 입장에서 압박이 쉽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상품 교역 문제도 농산품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해석된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한국은 관세 장벽이 가장 낮은 나라로 평가받는다”며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매년 작성하던 무역장벽(NTE) 보고서에 명시된 요구 사항들이 실제로 협상 테이블에 올라온 모양새”라고 설명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날 제주 서귀포시 국제컨벤션센터(ICC)에서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와 통상 협의를 마친 뒤 기자들을 만나 “국가별 관세 및 품목 관세 일체에 대한 면제를 재차 요청했다”며 “50일 정도 남은 협상 기간 동안 상호 호혜적인 결과를 낼 수 있도록 6개 분야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 장관에 따르면 그동안 한미 관세 협상을 주도할 영역으로 알려졌던 조선·액화천연가스(LNG) 협력은 관세 협상에서 빠져 별도로 논의된다. 안 장관은 “조선·LNG 협력 문제는 산업 협력”이라며 “관세 협상을 조건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어서 통상 협상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일단은 관세 협상 틀에서는 빠져 양국 국익을 상호 증진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이어간다는 이야기다. 실제 이번 안 장관과 그리어 대표의 회담에는 조선·LNG 관련 실무자들은 배석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관계자는 “조선업과 에너지 업계는 민간 차원에서도 활발히 협력 중”이라며 “양측이 이익을 얻는 협력 관계를 구축하면 관세 협상을 간접적으로 돕는 형태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관세 협상과 산업 협력, 그리고 재무 당국 간 진행 중인 환율 논의 결과가 모두 모여 7월 패키지가 완성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한미 양국은 다음 주 기술 협의를 열고 6월 중순에는 각료급 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 안 장관은 “다음 주 제2차 기술협의를 열고 관계 부처 간 협의를 진행할 것”이라며 “각료급 점검회의는 대선이 끝난 뒤인 6월 중순에 열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7월 패키지를 구성할 핵심 사안들에 대한 최종 결정은 다음 정권이 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대선 이후 다음 고위급 회담을 이어가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통상장관회의가 관세 협상을 이끌어가는 데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다. 우선 한미 양국은 이번 회의를 계기로 제주에 모여 14일 국장급 회의를 열고 15일 정인교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과 그리어 대표 간 면담을 진행하는 등 사흘간 긴밀히 접촉했다. 회의 기간 동안 15개국 이상과 진행한 양자 회담도 도움이 됐다. 정 본부장은 “회의 기간 동안 15개국 이상과 양자 회담을 진행했다”며 “제주에 모인 통상 장관들과 각국 상황을 공유하며 대미 협상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축적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한편 APEC 통상장관회의에서 미국과 중국이 진통 끝에 공동선언문을 채택하는 데 합의하면서 미중 갈등의 수위가 한층 더 낮아지는 것 아니냐는 기대가 나오고 있다. 공동선언문은 다자회의 결과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합의로 참여국 전원의 동의가 있어야 발표할 수 있다. 선언문 문구 하나라도 특정 회원국이 강하게 반대하면 의장국 명의의 성명을 내놓는 데 만족해야 한다.
다만 미중을 포함한 주요국의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자주의 강조’ ‘보호주의 반대’ 등 일반적으로 다자 통상장관회의에 들어가는 문구가 대거 사라졌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자유무역(Free trade)이라는 단어도 단 한 차례 언급되는 데 그쳤다. 미중 간의 조율을 거치면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한 언급이 배제된 것이다. 최석영 전 주제네바 대사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중요성을 인식한다는 식의 표현이 있지만 이는 특별한 의미 없는 형식적인 표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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